연성

[마틸드] She

백소白笑 2018. 3. 19. 16:34
이제 와 열정 불태우기에는 내 앉은 자리가 너무도 깊고, 네 발걸음은 칼바람에 쉬이 지워진다. 황무지에 이따금 핀 히아신스를 보며 어느 병약한 소년과 비밀스러운 화원의 이야기를 떠올리기엔 우리 모두 나이를 먹었겠지. 그럼에도 이 또한 지나갈 것을 알면서 밀어내지 않음은 내 마음 또한 노쇠한 증거일까. 비 없이 갈라진 땅에 씨를 뿌려 싹이 나는지 지켜보아라. 내 그 곁에 흔들의자를 두고 책을 읽으며 이따금 너와 대화하겠다. 햇빛이 눈을 찌르거든 눈살을 찌푸리며 낯을 피하고, 달빛이 구름에 숨어 이지러지거든 어둠 속에서 고요히 빛나는 눈을 들여다보는 일을 함께하겠어? 그리 세월 가는 줄 모르고 시간을 낭비하다가, 어느 날 내가 한 줌 흙으로 돌아갈 적 황혼녘에 작은 나무 비 하나를 깎아 태워다오. 그 타는 소리가 우리의 마지막 음악이 되겠지. 한 음 한 음이 바람에 실려 아주 머나먼 곳, 대양이 티폰처럼 웅크린 곳에 가 닿겠지. 페르세포네의 석류는 좋아하느냐? 낭만이라곤 조금도 없는 곳에 불꽃처럼 추락해주어. 모든 별이 한없이 높게만 보이는 바로 그 자리에서 다시 만나자.
사랑은 않는 에밀리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