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1127 [리리] Never Mind
주위에 사람이 많았다. 언제나 그렇듯이 저를 둘러싼 무리와, 구세주에게 비는 어린 양 같은 눈의 부모, 입으로 무언가 외치는 동생.
죽어버려!
비명 같은 단말마, 그것이 마지막 말이 되었다. 털썩, 쓰러진 사람이 세 명. 가여운 내 동생. 가여운 카티아. 어째서 네게는 항상 사과할 일뿐인지. 그것도 결코 용서 없을 일만이 우리에게 벌어지고 마는 걸까. 그게 뉘 때문인지는 모두가 알지. 다만 영영 잠든 지금만은 부디 아는 척 말아줘. 나를 원망해…… 네가 그래준다면 나는 더없이 기쁘고 슬플 거야. 우습게도 늘 나를 아껴주신 부모님보다도 네가 더 마음 쓰이다니, 역시 나는 네 말대로 불효자식인 모양이야. 죄송해요, 저는 항상 분에 넘치는 것만 바라는 욕심쟁이로 자라고 말았어요.
아빠, 아빠는 늘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 잘해줘야 한다고 하셨지요. 그들은 자격이 있다면서요. 하지만 저는 제가 좋다고 한 사람의 인생을 망가뜨렸어요. 그뿐만이 아니에요. 저를 아껴준 당신과 당신의 부인마저 죽여버리고 말았지요. 저는 얼마나 나쁜 아이인가요? 꾸짖어주세요, 아버지.
엄마, 엄마는 결혼은 중대사라고 하셨지요. 사람과 사람이 만나 서로의 평생을 맹세하는 마음을 가벼이 여기면 안 된다면서요. 그런데 저는 더 나은 대접을 받아야 했던 사람을 충동적으로 신부 삼고 마음을 찔렀어요. 저는 얼마나 나쁜 신랑인가요? 그 사람 대신 뺨이라도 쳐주시겠어요, 어머니. 당신 부부의 몸과 마음을 깨뜨린 값까지 셈해서요.
꾸지람도, 손찌검도 날아오지 않는다. 역시나 그들은 무른 부모였다. 심지어 원망의 목소리조차 들려오지 않는다. 너는 너무 먼 곳에 가버렸구나, 카티아. 이제 와 후회한다 말하기에는 모든 것이 늦어 지쳐버렸어. 아주 큰 상처를 입어서, 이대로는 어떤 꿈조차 달게 꿀 수 없어. 외로워, 외로워서, 혼자라 미치겠어. 그러니 이리 와, 내 신부 대신 품에 안겨. 나의 절망.
악몽은 생각보다 주기가 들쭉날쭉했다. 누님은 매일 꾼 것 같던데, 이마저 우리는 다르구나. 그런 생각을 하며 엘리아는 이불 속에서 몸을 웅크렸다. 도망자의 겨울은 쌀쌀하다. 3년 만에 재회하여 짐짓 괜찮은 시늉을 해보여도 그 속을 완벽히 덮어 뭉갤 수는 없었다. 사랑도 후회도 마지막 한 점은 보물처럼 안고 달아난 남자가, 이제 그것이 썩어가는 양을 본다. 한순간 빛났던 마음, 마침내 눈물 흘려낸 마음 따위가 바래간다. 머잖아 저것들을 속에서 들어내고 새로운 씨를 뿌려야 하리라. 썩은 것은 곧 거름 되어 토양을 비옥하게 한다고, 아직 아이였을 적 엘리아는 배웠다. 허나 이후에도 꽃을 다시 피워낼 수 있을까? 이 황폐한 땅에, 환희의 눈물을 뿌려 양분 주고 다정한 마음으로 감싸 안아 바라는 단 한 송이 꽃을, 감히 성자의 이름 받은 자가.
그런 기적을.
사랑도 미련도 남은 게 없다는 말은 거짓이었지. 이는 당신이 몰라도 될 기만이다.
그러니 용서하기를.
3년 만의 데이트. 오래된 극장에 두 사람은 앉아 있다. 고요한 관객들 사이 종종 훌쩍이는 소리가 들려온다. 엘리아는 힐끔 곁에 앉은 이를 본다. 그는 자주 그녀의 표정이 궁금하다. 그리하여 이해 서툰 눈으로 들여다보고, 영양가 없는 말을 내뱉고, 사교적이지 못한 마무리를 내고 마는 어른아이. 이런 어른이라면 누구도 사랑하지 않을 거야. 비뚜름한 미소를 한 점 머금고, 영화를 열심히 보는 듯한 낯에 고개를 돌려 화면을 다시 본다. 여자를 달래는 그녀의 다정한 연인, 오랫동안 품어 키운 진주알 같은 밀어들. 언젠가 말해주었다면 좋았을까 싶은 말이 불현듯 떠오름은 필연이었을까.
아름다워, 아름다워요, 언제나요.
당신은 가능성을 믿을까.
그것을, 알 수가 없었다.
마음이 일렁였다.
이미 불가능을 점치고 난 후였던지라, 당신의 답은 더더욱 의외였다. 해피엔딩이구나, 말하는 낯을 들여다보았다. 엘리아는 자신이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알지 못했다. 생각보다 말이 앞서 나갔다.
“저러고 또 다시 헤어질 수도 있어요. 당장의 실낱같은 가능성만 믿고 배팅하다니, 어리석어.”
“헤어지면 어떠니. 그래도 서로가 다시 마음에 들고 연애를 시작하게 됐잖아.”
“가능성은 가능성일 뿐이에요. 이후에 어찌 될지는 모르는 거지.”
“그래, 모르는 거지. 좋게 될 수도, 나쁘게 될 수도 있고. 그렇지만 아까도 말했듯이…… 그러면 좀 어때.”
담담한 음성, 단순한 결론. 역시 우리는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다르다는 생각. 한편으로는 조금 기뻤다. 당신이 나와 같았다면 사랑하지 않았을 것이다.
동시에 두려워졌다.
내가 이 사람을 다시 상처 입히면 어쩌지?
금실 같은 머리카락을 손끝으로 쓸었다. 부드럽고, 섬세하고 보이는 것보다 자극에 반응이 큰 사람. 그러면서도 은근히 속이 무른 이 사람을, 도대체 어떻게 대해야 좋을지.
“엘리아?”
품에 끌어안고도, 곁에 있다고는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이 사람을.
엘리아는 붉어진 눈시울을 어깨에 묻어 가렸다.
지나간 기억 같은 건 다 엿먹으라지. 2막은 지금부터 시작이니.
이번만은, 이번만큼은.
신을 믿지 않니, 엘리아?
네. 하지만 기적은 믿고 싶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