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바람에 손마디가 곱아든다. 장갑을 끼어도 가시지 않는 추위다. 엘리아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흐린 하늘에서 눈이 송이송이 흩날리고, 사람들은 들뜬 얼굴로 서로들 무언가 속삭인다. 다 짓밟아버리고 싶다. 희디흰 눈밭을 밑창이 더러운 신발을 신고 마구 뛰어다니고, 저 사람들의 소중한 상대들을 죽이겠노라 위협하고 싶다. 하지만 그런 짓을 하면 또 악당 신세다. 여기서 더 못된 사람이 되면 곤란해진다. 그러니 인내하고, 또 인내할 수밖에 없다. 충동을 참는 법은 그 사람의 얼굴을 떠올리는 것이다. 무슨 짓을 해도 더는 다치게 할 수 없을 사람의 얼굴이, 저를 보며 일그러지는 양을 상상하고는 입술을 깨문다. 그러지 마, 나를 사랑해줘.
하지만 당신이 용서하지 않았기에 오히려 당신을 사랑하고 말았지.
악당은 으레 그리 취향이 고약하다.
이제 와 한탄하거나 후회해서 될 일은 아니다. 이미 저질러버린 일들은 그러려니 넘겨버리기로 마음먹었다. 그러지 않고는 도저히 살 수가 없었다. 엘리아는 쓰레기였지만, 아직 죽고 싶지는 않았다. 아마도 미련이 남았던 모양이다, 채 짓밟지 못한 보석에. 자꾸만 눈이 가고, 그러다 마음까지 가버린 그 사람을 끝내 놓을 수가 없어서. 저와 어울리는 이도 아니거늘.
엘리아 로시와 엘리제 로시의 이야기는 동화가 되기에는 잔혹하고, 시가 되기에는 속물적이며, 하물며 누군가의 러브스토리가 되기에도 낭만이 부족하다. 허면 이것의 장르를 무어라 명할 수 있으며, 인물들은 어떠한 역할을 맡을 것인가. 엘리아는 곰곰이 생각해보았지만 그 무엇도 답은 되지 못할 듯했다. 탑에 갇힌 공주를 구하러 가는 왕자? 가둔 자는 바로 괴물로 태어난 왕자이며, 그자는 탐욕스럽기 그지없어 손아귀에 쥔 것을 내어주고자 하지 않는다. 또한 갇힌 이는 공주 아닌 왕으로, 왕자의 반역으로 유폐되었을 뿐 그 사이에는 어떠한 애틋함도 존재하지 않는다. 감금과 탈출에 관한 이야기를 한낱 인물이 마음대로 바꿔버릴 수 있을까? 엘리아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가족과 함께 오래오래 성당에 다닐걸 그랬다고, 뒤늦게 후회한다.
나는 기적을 믿고 싶어요, 계신지 안 계신지도 모르는 신. 응답해보세요. 된다, 안 된다 중 단 한 마디라도 부디 내 귓가에 흘려 넣어요.
나를 위해서가 아니더라도, 적어도 많은 것을 잃은 당신의 또 다른 자손―엘리제라는 이름의 인간을 위하여서라도 되니까. 그 사람 불쌍하잖아요. 너무 많이 빼앗겼잖아. 이제 귀찮거나 그렇지 않은 떨거지를 걷어차버릴지 말지 결정할 수 있게 해줄 때도 되지 않았나요.
그렇지 않은가요?
당신 정말 거기에 있어요?
당신도요, 엘리제?
답 없는 질문이 입 안을 맴돌아 기도를 막아서, 엘리아는 입을 벌린다. 목소리 대신 눈물이 나온다. 언 뺨 위로 흐르는 눈물은 금시에 싸늘해지고, 반짝이던 자안은 초점 잃고 흐려진다. 어느 모로 보나 미아의 행색인지라, 지나가던 이들이 힐끔거린다. 다 큰 어른이 길에서 저러고 있다니, 참 가엾고도 한심한 몰골이지. 수군거리는 목소리들이 파고든다. 개의치 않는다. 개의치 못한다. 나는 권리가 없다. 눈물이 또 한 줄기, 미끄러져 내리고.
눈물이 날 때면 반드시 당신이 보고 싶어진다.
다 얼어붙어 제대로 움직이지 않는 손을 움직여 휴대폰을 꺼낸다. 입력된 번호에 전화를 건다. 이윽고 목소리가 들려오자, 엘리아는 울컥거리며 올라오는 감정들을 쏟아내듯 속삭인다. 깊고 깊어 썩어버린 마음을 담아, 간절히, 짐짓 애절하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