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리] 천국은 아닌
한 해가 저물어간다.
당신은 커피 잔을 든 채 창밖을 바라보고 있다. 저 노을이 지나면 밤이 오고, 그러면 또 하루가 떠나가겠지. 감상적인 생각은 내 주력이 아닌데, 어울리지 않는 짓을 참 많이도 하고 있다. 이건 다 당신 때문이지. 탓하지는 않아도 묘한 기분이 들어 곁에 다가가자 돌아보는 푸른 눈에는, 아, 오롯이 내가. 잠시 숨을 멈추고, 다시 호흡한다. 나는 언제나 이 사람이 말도 안 되는 사랑을 품었음을 기억한다. 결코 잊지 못한다, 절대로. 죽어도 당신에게만은 더 죄인 될 수 없어. 당신이 차분한 낯으로 묻는다.
“왜 그래?”
“아무것도 아니에요.”
대답은 빠르게, 기다리게 하지 말기. 그런 철칙을 만들었다. 무언지 알 수 없는 것, 명명할 수 없는 것은 분명 아무것도 아닌 거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러니 이것은 기만이 아니다.
“뭔가 생각한 얼굴이라서.”
“누님 생각 했다면 믿을 거예요?”
“듣기 좋은 소리를 하는구나.”
가벼운 웃음에 따라 미소 짓는다. 당신이 내 얼굴을 좋아하기 때문이 아니더라도 절로 우러나오는 것이 있다. 그것이, 참으로 신기하다. 마음 없이도 걸치던 겉치레가 아닌 진짜 웃음을 끌어내는 사람이 있다는 것, 그리고 그게 수많은 사람 중에서도 당신이라는 것이. 기적이 있는지 묻는다면 내 앞에 선 이 사람이 기적의 현현이라 할 터다.
“너와 이렇게 연말을 보내게 될 줄은 몰랐는데.”
짐짓 가벼운 목소리를 가장해도 무슨 뜻인지 우리는 안다. 나는 그저 웃어 보이고 만다.
“난 누님이 생각보다 얼굴 보는 게 참 재미있다니까요.”
“얼굴만 보는 건 아니란다, 엘리아.”
“알아요. 나를 봤지.”
안아주고 싶은 타이밍인데, 커피를 쏟을까봐 잠시 머뭇거린다. 다행히 그새 눈치 챈 당신이 커피잔을 창가에 내려둔다. 나는 팔을 벌려 당신을 끌어안고, 당신의 팔도 나를 감싼다. 닿은 온기가 이따금 먹먹할 때가 있다. 이건 당신도 마찬가지겠지.
“고마워요, 나를 봐주어서.”
“그럴 땐 사랑한다고 하는 게 맞단다, 남편.”
“좋아요, 유일하게 사랑하고 있어요.”
나는 작게 웃음을 터뜨리고, 당신의 어깨 위에 턱을 올린다. 서로의 표정이 보이지 않는 자세가 아직까지는 우리에게 가장 잘 어울릴지도 모른다. 조그맣게 속삭여오는 말에 심장이 조인 것을 당신은 알까.
“나도.”
무거운 숨을 토해내고, 안은 팔에 힘이 들어간다. 난 할 수만 있다면 당신한테 심장이라도 꺼내주고 싶어. 내가 가진 모든 걸 주고 싶다가도, 가장 귀한 것만 골라 바치고 싶어져. 당신은 어때? 당신은, 나를 밀어내고 싶어질 때가 한순간도 없어?
내가 해줄 수 있는 건 고작 이뿐이지. 늘 곁에 있겠노라 다짐하고 또 다짐하는 거. 그래도 당신은 나를 필요로 해줄 테고. 마음이 변하거든 죽여달라 했으니 당신은 나를 목숨 걸고 사랑하는 셈이다. 무딘 가슴에 저릿한 통증이 번지고, 당신이 내게로 와 넘쳐흐른다. 눈물이 꽃잎 될 수 있다면 우리는 진작 화원을 일구었으리라. 나의 화원을 끌어안는다. 이 하잘것없는 온기로라도, 겨우내 얼어붙지 않기를. 우리는 계속 함께일 테니까.
당신이 죽을 때까지.
이 기적이 끝나지 않기를, 당신이 울 일 없기를, 나는 소망한다. 내가 만들어낸 악몽에 시달리는 당신을 내가 끝까지 책임질 수 있게 하기를.
내년을 위한 소원을 들어줘요, 그 정도는 할 수 있잖아.
이윽고 눈이 내린다. 나는 타이밍을 놓치지 않고 당신에게 입맞춘다. 당신은 거절하지 않고, 나는 행복을 느낀다.
거짓 은 없는 사랑. 그걸로 된 거다, 우리는.
충분히 행복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