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리아는 나중에 어떤 사람이랑 결혼하고 싶어?”
곱슬거리는 백금발을 하나로 모아 묶은 어머니가 웃으며 물었다. 곁에 선 아버지도 최대한 자상히 웃어 보이며 아들을 내려다보았다. 이제 열 살 먹은 소년은 가만히 눈을 깜빡였다.
“모르겠어요.”
“너무 빨리 대답했잖아. 좀 더 생각해봐.”
어머니가 깔깔 소리 내어 웃었다. 소년은 어머니를 빤히 쳐다보다 고개를 갸웃, 했다. 어머니 것과 꼭 닮은 빛깔의 백금발이 이마 위로 흘러내렸다.
“음, 웃는 얼굴이 예쁘면 좋겠어요.”
그저 예쁜 것이 좋아 한 말이었다. 그래도 부부는 입술 끝을 끌어올렸다.
“옳지. 그리고?”
“믿을 수 있는 사람이어야 돼요.”
“부부간의 믿음은 중요하지.”
“맞아. 똑똑하네, 우리 아들.”
어머니는 눈웃음을 띠고 솜털이 보송보송한 뺨을 쓰다듬었다. 아버지도 제법 흐뭇한 얼굴이었다. 소년은 그런 게, 하고 말을 꺼내려다 입을 다물었다. 정확히는 ‘기대할 수 있는 사람’이란 표현이 더 어울릴 터였다. 그보다도 핵심에 가까이 가 닿으면, 자신을 지루하지 않게 해줄 사람. 그러나 지금 굳이 정정하지 않는 편이 부모님을 기쁘게 하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소년은 아직은 좋은 아들이고 싶었다.
“그리고 또? 더 없어?”
“음.”
소년은 고민했다.
“존경할 만한 사람이면 좋겠어요.”
예상 밖 답이었는지 부모님은 다소 놀란 듯했다. 아버지가 더 짙어진 미소를 감추지 않은 채 물었다.
“그건 좀 철학적이네. 왜 그렇게 생각했는데?”
하여간 어른들은 늘 시시콜콜 캐묻는다. 어차피 별것도 아닌데. 소년은 평이한 어조로 대답했다.
“그럼 더 잘해줄 수 있을 것 같아서요.”
“세상에.”
어머니는 감동한 얼굴이었고, 아버지도 이제 자부심을 참지 않는 티가 역력했다. 딱히 칭찬받으려 한 말은 아니었지만 소년은 기분이 조금 좋아졌다. 어머니에게 볼 키스를 받고는 더욱 그랬다. 어쨌든 아이는 아이였다.
“우리 아들은 좋은 남편이 되겠다. 엘리아랑 결혼할 사람은 누군지 몰라도 정말 행복하겠네.”
어머니가 소년을 꽉 끌어안았다. 소년도 방긋 웃으며 마주 끌어안긴 채, 부모님께 말하지 않은 마지막 희망사항을 그대로 삼켰다.
웃지 않을 때도 아름다워야 해요, 저랑 결혼할 사람은. 그래야 우리는 오래오래 사랑할 수 있을 거예요.
다정하게, 변치 않는 마음으로.
십수 년 후.
“엘리아, 그 얘기 안 해줄 거야?”
담벼락에 피보라가 튀었다. 엘리아는 장갑 낀 손을 털며 돌아섰다. 으, 묻었어. 조금 찡그린 낯을 보며 마르코는 재미있다는 듯 웃었다.
“뭘?"
“엘리제 말이야. 다 들었어, 남들 다 보는 데서 데이트 신청한 거.”
“아.”
오묘한 빛 도는 자안이 잠시 정면을 비꼈다. 언제 보아도 얼굴만은 최상품인 치였다. 그러나 그 속에 들어앉은 꼬인 어린애의 명성 또한 퍽 자자하여, 마르코는 아가씨의 취향이 굉장히 독특하다고 생각했다.
“소감이 어때?”
“조금 놀랐어.”
“그게 다야?”
엘리아는 작게 웃었다. 원하기만 하면 못 가질 것이 없을 아가씨가 은애하는 이의 이름이 하필 사랑 모르는 엘리아 힐라리오 로시라니. 엘리아는 누군가 저를 좋아한다는 이유로 불쾌해하며 못살게 굴거나 조롱하는 취미는 없었으되, 죽었다 깨어나도 쉬운 사내가 되지는 못할 터였다. 황무지에 금칠을 하여 보기 좋게 꾸민 것이 딱 엘리아 로시라는 인간의 형상이리라고, 같은 조직원끼리도 이따금 수군거리기 일수였다. 엘리아는 맞는 말에 구태여 반응하지도, 스스로에게 별다른 불만을 안지도 않았다. 간절히 바라는 것 없이 텅 비어 무엇도 품지 않는 그릇이 엘리아 로시였다.
“보스께서 연애결혼을 허락하실까 몰라.”
“내가 개의할 바는 아니라.”
엘리아는 품에서 손수건을 꺼내 뺨의 핏자국을 닦았다. 피비린내와 시체였던 남자가 죽으며 내놓은 분비물 지린내가 섞여 허공에서 역한 냄새가 풍겼다.
“누님이 알아서 하시겠지. 난 신경 안 써.”
“정말? 너 그래도 엘리제는 좀 좋아하잖아.”
“인정하는 거지, 좋아하는 것까지는.”
“이제부터는 더 좋아할 것 같은데. 미인이니까 싫지도 않았을 테고, 아니야?”
엘리아는 한쪽 눈썹을 끌어올렸다. 마르코는 씩 웃곤 대답을 기다렸다.
“뭐, 내가 이러고 다니는데도 좋다니까 신기하기는 하네.”
“그러게 말이야. 대단하긴.”
마르코가 기지개를 켰다. 엘리아는 마르코에게 잠시 시선을 주었다가 이내 돌아섰다. 중요한 이야기를 하기에 적절한 장소는 아니었다.
처음 보스를 배반하자는 이야기가 나왔을 때, 엘리아는 시큰둥했다. 굳이 그래야 하나? 나는 지금도 딱히 불만은 없는데. 태평한 소리를 해대는 엘리아를 설득한 사람이 마르코였다. 제안은 단순했다. 널 보스로 모실게. 그 정도면 충분했다. 애초에 마피아의 그 과시와 권력이 없었더라면 이 바닥에 들어오지 않았을 터였다. 엘리아는 숙고하되 결단은 확실한 인간이었고, 다른 조직원들은 그런 점이 높은 자리에 걸맞다고 평가했다. 엘리제의 마음을 알고도 태도가 크게 변하지 않은 점 또한 마르코의 예상 내였다. 엘리아 로시는 그런 인간이었다. 감정에 극도로 무딘, 유용한 도구 같은 인간.
그나마 의외였던 점은 챙길 가족이 있다는 사실 정도였다. 원체 자기 이야기를 잘 하지 않는 치인 데다 대개 마피아 집단에는 마르코처럼 고아거나 가족과 절연한 경우가 많아 그 중 하나려니 지레짐작할 뿐이었건만, 뜻밖에도 제법 멀쩡한 가정의 장남이었다. 누이동생은 오빠를 경멸하는 모양이었으되, 부모는 아직 장남을 포기하지 않았던지 보자마자 울더라고 엘리아는 말했다.
“뭐야, 그렇게 정성스러운 부모님이 있었어?”
마르코는 키득이며 웃었다. 속에서는 그런 자식이 왜 마피아 노릇을, 하고 비꼬는 고아 꼬마의 목소리가 들렸지만 사감을 억누를 수 있었기에 지금까지 조직에서 버텨온 것이었다. 엘리아는 눈을 살짝 내리깔았다.
“이젠 나랑 관련 없어.”
“연이라도 끊고 온 거야?”
건성으로 던진 말이었는데, 엘리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순간 마르코의 표정이 기묘하게 변했다. 절로 찬 웃음기 어린 목소리가 튀어나갔다.
“왜? 갑자기 꼴도 보기 싫었어?”
“다시 만나면 안 될 테니까, 서로를 위해서야.”
“네가 그런 걸 다 신경 썼어?”
빈정대는 말에도 엘리아는 팔짱 낄 뿐이었다.
“멀리 보냈어.”
“죽였어?”
순간 일 없이도 웃고 다니던 낯짝이 대번에 식었다. 윗놈들에게 짜증나니 웃지 좀 말라는 시비를 걸려도 변함없던 얼굴이었다. 서늘한 자안이 마르코를 노려보았다. 마르코는 저도 모르게 움찔했다. 이윽고, 벨벳 같은 목소리가 깔렸다.
“입 조심해.”
그러고는 휙 돌아서 쌩하니 가버리는 엘리아 로시의 뒷모습에, 마르코는 공연히 바닥에 침을 탁 뱉었다. 사과는 필요치 않을 터였다. 고작 이런 일로 마음을 바꿀 인간은 아니리라. 다만, 당분간은 조금 엎드리자. 다소 찝찝하면서도 퍽 불쾌한 기분으로, 마르코는 발에 채이는 돌멩이를 걷어찼다. 아무쪼록 공작의 심기는 거스르지 않는 편이 좋았다. 그리고 이후 엘리아는 예상대로 그 대화를 언급하지도, 변하지도 않았다. 지긋지긋할 만큼 한결같은 사내였다.
마침내 다가온 디데이 당일에도, 엘리아의 행보는 탁월했다. 보스 다음으로 걸림돌이 될 듯한 엘리제의 데이트 신청을 받아들여 함께 외출한 것이었다. 그 사이 엘리아의 잠정적 부하들은 아직 보스에게 충성심이 남은 졸개들을 완벽하게 처리했다. 적지 않은 시체와 일부 재산 손실이 있었으나 해결 가능한 문제였다. 보스 부부는 하나밖에 없는 딸이 외출에서 돌아온 바로 그때 최후를 맞이했다. 무얼 하고 왔는지 몰라도 퍽 즐거워 보이던 엘리제의 표정이 굳자 몇몇 몰상식한 놈들은 낄낄거렸고, 엘리아와 마르코는 차분했다. 과거의 권위에 바치는 마지막 경의였다. 그 애한테서 떨어져! 외동딸 곁에 선 배반자에게 고함친 것을 유언 삼아, 보스는 본 적 없는 분노와 공포로 범벅이 된 얼굴을 바닥에 찧었다. 방에서 뛰쳐나온 부인 또한 비명을 지르며 쓰러졌다. 엘리제는 멍하니 굳어 있다가 뒤늦게 무슨 짓이냐 고함쳤으나, 일은 벌어진 뒤였다. 엘리아는 그날 하루 동안 정중히 에스코트해드린 아가씨의 귓가에 속삭였다.
데이트 즐거웠어요, 누님.
그러고는 재킷을 벗어 부부의 시체 위로 던졌다. 엘리제 앞을 스쳐 지나가는 등이 주인처럼 당당했다.
“수고했어, 다들.”
새 보스의 치하에 공손한 인사가 잇따랐다. 엘리제는 뒤늦게 총을 뽑아 겨누었으나, 그와 동시에 주위를 둘러싼 조직원들이 전원 옛 아가씨를 겨냥했다. 총 꺼내는 소리가 거슬렸는지 엘리아는 느릿느릿 고개를 돌렸다. 푸른 눈과 보랏빛 눈이 그제야 마주쳤다.
“총 내려놔요, 누님. 안 그러면 나도 목숨 보장 못 할 것 같으니까.”
엘리아가 한 걸음 다가섰다. 엘리제는 여전히 총을 겨눈 채였다.
“내가 생각하는 그런 상황이라면 곱게 죽이진 않을 거야, 엘리아 힐라리오 로시.”
그 말에 엘리아는 아, 역시, 하는 표정을 짓고는 살짝 웃었다.
“지금은 나보다 누님이 먼저 죽을 것 같아서요. 내려놔요. 누님이 총 겨눌 거 예상 못 하고 나갔던 거 아니니까.”
“화근은 남기지 않는 게 좋지 않겠니, 아버지가 너에게 그것도 가르치지 않으셨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데. 날 살려서 뭐하게.”
엘리아는 음, 하고 작게 목을 울렸다. 고개를 살며시 모로 기울이는 꼴이 천진했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거든요. 데이트하고 온 날 죽는 건 기분이 별로일 것 같은데, 좋아하는 사람한테 죽는 건 더더욱 그렇겠다고요. 나는 그래도 누님이 조금 마음에 들었으니까 살려주려고요.”
마르코는 과연, 이라고 생각했다. 과연 엘리아 로시다. 저따위로 저에게 연정 품은 남의 마음을 헤집어놓는 말을 가차 없이 해대려면 우선 발화자가 엘리아여야 할 터. 엘리제 역시 비슷한 감상이었는지, 알 수 없어도 그다지 중요치 않을 다른 이유였는지 헛웃음을 뱉었다.
“그래, 기분 정말 더럽네.”
그렇게 한참을 서 있던 엘리제는 천천히 총을 내리고는, 바닥에 떨어뜨렸다. 심복들이 잽싸게 총을 수거해갔다. 오롯이 두 사람의 무대인 양 주위는 고요했다. 엘리제는 피로해 보였다.
“그래서 이제 어떻게 할 건데?”
엘리아는 엘리제를 쳐다보다 느리게 웃었다. 다시 한 번 에스코트를 신청하는 것처럼 내민 손이 깨끗했다.
“죽이지는 않을게요. 방으로 가실까요.”
엘리제는 싸늘한 눈으로 가족의 원수를 바라보았다. 죄책감은 한 점도 묻어나지 않는 말끔한 얼굴이었다. 지난 낮과 전혀 다른 바가 없었다. 다문 입술이 떨어졌다.
“차라리 죽여줄래? 아니면 내게 죽어주든가.”
그러고는 홀로 옮기는 걸음이 퍽 도도했다. 마르코는 애써 웃음을 삼켰다. 마지막으로 가시 세우는 아가씨의 모습이 아무리 보아도 처량한데, 저 아가씨를 어쩌면 좋나. 엘리아가 마지막까지 굽히지 않은 뜻이 있어 당장 처리하기는 곤란할 터인데, 후에 다시 말해보아야겠다.
엘리아는 무시당한 손을 가만히 내려다보다 아무 일 없었던 듯 제자리에 두었다. 돌아선 얼굴의 두 눈은 한결같이, 곱디고운 보랏빛이었다. 그런 눈으로 평생을 살았을 치였다.
“치워, 지저분하네.”
턱끝으로 난장판이 된 자리를 가리키고는 엘리아 또한 유유히 자리를 떴다. 마르코는 잠시 한쪽 눈썹을 올렸다가, 이내 남은 아랫것들에게 고개를 돌렸다.
“못 들었어? 빨리 움직여!”
그제야 아랫것들의 움직임이 부산해졌다. 마르코의 입가에 웃음기가 스몄다. 생각하기 귀찮은 트러블은 오늘 하루만 묻어놓자. 그토록 고대해온, 마침내 축배 들 날이었다.
보호인지 감금인지 모를 조치로 방에 틀어박힌 엘리제는 짐짓 안정을 가장하였으나, 그것이 거짓임은 심어둔 눈과 귀가 보고해왔다. 기실 보고 없이도 능히 예상 가능한 일이었다. 그나저나, 애정은 사그라지고 이제 증오만 남은 고양이 아가씨는 여기까지였을까. 이따금 마주할 적마다 엘리제는 새로운 표정을 보여주었고, 엘리아는 그것이 조금 아쉬우면서도 호기심이 일었다. 마르코가 일러주지 않아도 엘리제가 위협임은 알았다. 다만 다른 이들은 죄 죽여도 엘리제만은, 아직, 죽이고 싶지 않았다.
단 하루뿐이었던 허울뿐인 데이트가 퍽 즐거웠는지도 모른다. 눈을 맞출 때마다 고운 벽안에 번지던 즐거움, 기쁨, 애정 같은 것이 눈에 밟혔을 수도 있다. 어느 쪽이건 엘리제는 현재 엘리아에게 필요한 존재였다. 아집에 불과함을 스스로 알아도, 엘리아 로시에게 아집은 비길 것 없는 보물이기에 고민할 것도 없었다. 흥미가 식을 때까지 곁에 둘 방도로 고른 선택지는 엘리아 로시답게 기상천외하여, 마르코를 비롯한 심복 전원이 기함하는 신기록을 세웠다.
“왜 안 돼?”
건성으로 멘 넥타이를 보다 느슨하게 풀며 엘리아가 물었다. 마르코는 거의 입에 거품을 물 기세였다.
“그걸 말이라고 해? 엘리제랑 결혼한다고? 제정신이야? 허니문에 칼 맞고 죽은 마피아 보스로 대서특필되고 싶어?”
“설마 누님이 나를 첫날부터 죽이시려고.”
“미친 소리 좀 작작 해, 로시!”
“이젠 너까지 날 그렇게 부르게? 누님인 줄 알고 기대하니까 그렇게 부르지 마.”
“진짜 미치겠네.”
마르코가 제 머리를 헤집었다. 엘리아는 느긋하게 마르코의 머리가 까치집이 되어가는 꼴을 구경했다.
“새가 당장 알 까도 되겠어, 마르코.”
“넌 좀 입 다물어.”
“보스한테 무례하긴.”
투덜거리는 목소리였지만, 마르코는 먼저 입을 다물었다가 곧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보스가 된 후의 엘리아는 전보다 더 조심스럽게 대해야 했다. 이상하게 부쩍 예민해진 것 같은 부분이 신경 쓰였다. 물론 설마 그게 엘리제 때문일 거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엘리아의 감정은 변덕과 호기심이 전부였으며, 엘리아가 아무리 미친 인간이라 해도 이제 와서 엘리제에게 세레나데를 부를 위인은 절대 못 되었다. 그러니까 딱 백일만 소꿉장난질을 해보겠다는 엘리아의 말이 백 퍼센트 헛소리로 들리지는 않았다. 분명 끔찍할 만큼 진심일 터였다.
“대체 어쩌려고 그래? 왜 평생 안 할 것 같던 결혼을, 그것도 엘리제랑 한다고.”
“말했잖아. 누님 정도면 결혼해서 같이 살 수 있을 것 같다고.”
“그거 엘리제가 들으면 기분 엄청 나빠할걸.”
“기분이야 내 존재만으로도 나빠질 텐데, 뭐.”
마르코는 가슴을 치고 싶었다. 말이라도 못하면 좀 덜 얄미울 텐데, 저 혓바닥만은 저놈이 욕을 잔뜩 먹고 실컷 장수하다 죽은 후에도 싱싱하게 살아 있을 거다. 그 와중에도 엘리아는 남 속도 모르고 또 미친 소리를 지껄였다.
“역시 청혼할 때는 흰 정장이 좋을까? 결혼식 때 입는 색이기도 하고, 나 화사한 색이 잘 받잖아.”
“코디는 나한테 묻지 마! 아니, 아무것도 나한테 물어보지 마!”
“하긴, 좋은 조언을 받으려면 돈을 써야겠지.”
“너 나한테는 돈 안 주고 물어볼 생각이었어?”
“우리 사이에 그럴 수도 있지.”
태평한 목소리에 마르코는 끝내 뛰는 듯한 걸음으로 방을 빠져나갔다. 네 맘대로 해! 비명 같은 고함을 듣고 엘리아는 고개를 갸웃했다.
“새삼스럽게.”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꽃 주문을 넣는 엘리아의 낯이 훤했다. 누님이 장미를 좋아하셔야 할 텐데, 중얼거리는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사랑하지는 않더라도 장난감을 품에 안듯 아낄 수는 있다. 엘리제는 엘리아가 기대하게 만드는 사람이었다.
그리하여, 지금 엘리아는 엘리제 앞에 섰다. 마르코에게 말했듯이 가장 고급스러운 흰 정장 차림으로, 싱싱하고 화려한 장미 꽃다발을 품에 안은 채. 누님은 멋진 분이니까 줄곧 저를 걱정해왔을 부모님도 소식을 들으면 기뻐할 거다. 멋진 아가씨와 결혼하는구나, 엘리아. 기뻐하는 부모님의 목소리가 귓가에 들리는 것처럼 생생하여 상상만으로도 즐거웠다. 짝을 찾는 건 좋은 일이었다.
반면 생글생글 웃는 낯을 담은 푸른 눈에는 분노가 차올랐다. 마르코의 고집으로 경호를 붙인 탓에 당장이라도 엘리아를 죽이지 못하는 것이 아쉬운 모양이었다. 엘리아 뒤에 선 경호팀은 먼저 총을 빼어들고 대기하면서도 불안한지 일렁이는 공기가 엘리아의 등에 한가득 달라붙었다. 엘리아는 절로 눈꼬리를 휘어 웃었다. 아, 정말 재미있다니까.
“지금 뭐하는 거야?”
“보시다시피 청혼하러 왔지요, 누님.”
날 선 반응도 개의치 않고 찡긋 윙크를 날리자 엘리제는 기가 막힌 듯했다. 그러나 예나 지금이나 엘리제의 사정은 엘리아가 알 바가 아니었다. 어차피 제 도움 없이는 살아남기 어려울 이임을 아는 까닭이었다. 우위를 확실히 가리는 눈은 이 바닥에서는 필수다. 그러니 거절은 정해진 선택지에 존재하지 않는다. 장미꽃다발을 내밀고, 달큼한 미소를 입가에 걸고, 눈앞의 단 한 사람을 오롯이 풍경에 담았다. 이것은 오직 당신과 나만을 위한 놀음.
“리제리제, 나랑 살래요? 내가 당신을 살려줄게요.”
돌이켜 곱씹어보아도, 참으로 오만한 구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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