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전에 올린 폐록 연작 단문이랄지!
지고 제일의 상인 집안 성가의 따님은 그 부모가 유일하게 애지중지하는 자식이었다. 예설이라 이름 붙은 아가씨는 성년을 넘긴 오라비보다 세 살이 어렸으되, 그에 못지않게 성숙했다. 그런 자를 혈육으로 두고서는 성숙해지지 않을 수 없는 노릇이었다.
예설은 오라비가 싫고 무섭고, 또 부끄러웠다. 고리대금업 따위를 하며 사람들을 겁박해 성가에 먹칠을 하는 자다. 그럼에도 부모님이 후계를 바꾸지 않는 것은 저보다 오라비가 비교도 되지 않는 장사꾼임을 알고, 자식을 감싸안고픈 어쩔 수 없는 마음 때문일 터였다. 예설 본인도 가주 자리에 관심이 없어 아쉽지는 않았다.
다만 두려웠다. 아버지가 정정하신데도 벌써부터 집안을 휘두르며 하루가 멀다 하고 집에 난장치러 오는 자들을 방치하는 오라비였다. 신기하게도 저와 부모님은 나름대로 상냥히 대하는 듯하나, 얼굴에 주먹질을 해대려는 체납자를 앞에 두고 그림처럼 웃는 양이나 전속 하인들이 크고 작은 잘못으로 주기적으로 주인에게 무시무시한 말을 듣고 매질당하는 것 따위가 번번이 피어날 뻔한 정을 죽였다. 예설은 도저히 오라비, 예홍을 아낄 수가 없었다.
그래서 사람 탈을 썼으되 사람 같지 않은, 그 무심한 자에게도 가족 아니어도 귀애하는 자가 있음을 처음 확신했을 적에는 크게 놀랐다. 복완의 소호라 하였던가. 저보다도 어린 아가씨가 아직 아이일 때 만났다던데, 평시 아이를 좋아하지도 않는 오라비를 어찌 진심으로 반기는지 통 알 수 없었다. 처음 만난 이래 수년이 지나서도 종종 방문하여 예홍을 보고 가더니, 그나마 요즘은 복완가에 난리가 난 이후 어린 가주 되어 수습한답시고 방문이 없었다. 그러나 이제는 대신 오라비가 서신을 보내거나 먼저 방문하기도 한다니, 그야말로 귀신이 곡할 노릇이었다. 그래도 저런 치에게 그 정도 호감을 받는다니 복완소호 또한 대단한 자가 아닌가, 예설은 앞에 앉아 고고히 차를 마시는 예홍을 보며 생각했다. 문득 떠오른 것이 있어 불현듯 입을 열었다.
“오라버니.”
“응?”
차를 음미하던 보랏빛 눈이 예설을 향했다. 언제 보아도 고운 빛깔이나,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님을 예설은 오라비 덕에 배웠다.
“벗과는 지금도 잘 지내?”
진심으로 궁금한 점이었다. 종종 패물을 보내기도 한다는 이야기를 들어서 더더욱 그랬다. 혹시나 그 어리고 신분차 확실한 이에게 무언가 마음을 품은 것은 아닌지 염려되었다. 오라비가 지난번 이미 첫사랑에 한 번 실패한 적 있음이 떠오르기도 하였다. 물론 그러한 궁금증을 대놓고 풀어놓을 자신은 없었다.
예홍은 느긋한 동작으로 찻잔을 탁자에 내려놓더니 평온한 어조로 답했다.
“좋아하고 반겨주어서 볼 적마다 즐겁다.”
나를 비난하고자 함인가, 예설은 잠시 생각했다. 허나 예홍은 적어도 가족에게는 비꼬는 화법을 사용하지 않았다. 남을 찍어 누르는 그 화술에 가족이 학을 떼는 까닭인지, 혹은 가족은 그리 대할 상대가 아니라 판단한 것인지 확신할 수 없었다. 피가 이어져 있어도 예홍은 머나먼 곳에 있는 사람 같았다.
“어떤 사람이야, 그분은?”
“너도 종종 보아 알 텐데. 괜찮은 이다.”
“오라버니가 생각하는 그분은 어떤 분인지 궁금하다는 뜻이야.”
“갑자기 왜? 대답 못 해줄 것은 없다만.”
예홍이 찻잔을 한 번 더 기울였다. 예설은 답할 바를 몰라 잠시 입술만 달싹였다. 그 모양을 보던 예홍이 입을 열었다.
“열심히 살아서 응원해주고 싶은 사람이다. 종내에는 본인의 행복을 이루기 바라.”
예설의 눈이 동그래졌다. 지금 저가 제대로 들은 것이 맞는가, 곰곰이 생각하여도 제 청력에는 이상이 없었다. 누군가의 행복을 빌다니, 오라버니가, 바로 이자가? 낮꿈을 꾸는 것이 아닌가?
“오라버니, 혹시나 연정을 품거나 한 것은 아니지? 복완은…….”
아무리 대상인 집안이라 하여도 평민과 상현 귀족의 신분차는 명확한 바. 복완 직계가 거의 멸족한 현재는 몰락귀족에 가까운 상태일지 몰라도 주위 시선이 곱지 않을 터였다. 현재 예홍의 평판이 더 떨어질 데가 없다 하더라도 혼인은 중대사였다. 그러나 정작 예홍은 태연했다.
“그런 것을 고려하기에는 아직 어리니, 생각도 않고 있어.”
“허면, 더 나이가 차거든 의향이 있다는 게 아니야?”
예설이 기겁하며 물었다. 예홍은 작게 웃었다.
“설아, 내게도 벗이 필요해. 그런 사람이다, 소호는. 정략적인 결합이라면야 못 할 것은 없겠지만, 그런 식으로 연 맺지 않아도 충분히 귀한 사람이니 네가 벌써부터 관여할 필요는 없어.”
더 참견하지 말라는 분명한 거절이었다. 그래도 제게는 퍽 관대한 오라비이건만, 예설은 조금 자존심이 상했다. 그 어린아이가 저보다 기꺼운 존재라는 말인가. 그래도 오라비라고 일말의 정은 남아 있었는지, 멀리한 쪽은 저여도 오라비가 저와 다른 가문 아이를 저울질하는 것은 기분이 묘했다. 목소리가 조금 부루퉁하게 나갔다.
“그래? 앞으로도 정말 참견할 일이 없을지는 두고 봐야겠는걸.”
“글쎄, 내가 과연 혼인을 할지는 잘 모르겠는데…… 나는 나보다는 네가 먼저 혼인하기를 바라.”
뜻밖의 발언이었다. 예설은 또 놀랐다.
“내가, 오라버니보다 먼저?”
“그래. 내가 정정할 때까지는 장사를 맡겠지만, 그 다음에는 네 자식이 현명하거든 맡겨볼 생각이야. 네 남편 될 이는 누군지도 모르고 나와 나이 차가 클 것 같지도 않아서.”
예설은 의자를 바짝 당겨 앉았다. 예홍이 빈 찻잔에 차를 따라 내밀었다. 여전히 놀라움을 감추지 못한 얼굴로 차를 한 모금 마신 예설이 물었다.
“진심이야? 정말로, 내 자식에게 물려주겠다고? 그 애가 아들이든, 딸이든?”
“누구라도 능력이 있으면 할 수 있을 테니.”
“그야 그렇겠지만…… 후계 문제는 신중하게 생각해야지. 오라버니가 정말 혼인할지 말지 아직 모르는 일이잖아. 그때 되면 지금 말한 것 후회할 거야.”
예홍은 가만히 눈웃음을 띠었다. 낮의 햇빛이 창가를 넘어 예홍의 얼굴로 기울었다.
“설령 혼인한다 해도, 나는 자식을 남기고 싶지 않아.”
“왜?”
“나를 닮은 아이를, 사랑할 수 없을 것 같아서. 그것은 아이에게 미안한 일이 되겠지…….”
예설은 무슨 말을 해야 좋을지 몰라 그저 침묵했다. 예홍 또한 구태여 말을 늘일 마음은 없는지 그를 끝으로 웃음 지을 뿐이었다. 마지막 모금을 들이켠 후 빈 찻잔을 내려놓은 예홍은 소리 없이 의자를 뒤로 밀며 일어섰다.
“자, 이제 내 휴식 시간은 다 끝난 것 같구나. 너는 더 쉬고 싶다면 쉬어라. 차 맛이 썩 괜찮으니 즐길 만할 거다. …… 평안한 낮 보내기를.”
그러고는 무슨 색이라 분명히 지칭하기 어려운 그 긴 머리카락과 푸른 옷자락을 휘날리며 지나쳐 가는 예홍을, 예설은 잡지 않았다. 둘은 그럴 사이가 아니었다. 홀로 남은 예설은 예홍의 빈 찻잔을 내려다보다가, 조용히 제 잔을 들어 한 모금 더 마셨다. 쌉싸름한 향이 감돌았고, 때는 아직도 너무 밝은 한낮이었다. 다실 밖 모든 것이 아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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