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은 곧 앓음이었다. 태어날 때부터 아팠고, 죽을 때도 고통을 안았다. 화목한 가정을 꿈꾸던 어린 날이 지나간 후로는 줄곧 악몽뿐이었다. 평생 행복 같은 것은 모르고 살리라 여겼다. 공연히 클로버의 잎 개수로 행복과 행운이 나뉘는 것이 아니었다. 그 둘이 동일한 뿌리에서 나는 까닭에 그 조그만 풀을 기준 삼은 것이다. 뒤늦게 어머니에게 클로버를 가득 꺾어다주어도 그저 행복해 보이지는 않던 그 낯을 이해했고, 가련히 느꼈다. 그리고 미안했다. 아이는 아이가 아이여서 어머니를 돕지 못하는 것이라 생각했고, 아주 틀린 가정은 아니었다. 아비가 도박질을 해대는 것은 한낱 아이가 막을 만한 일이 아니다. 나날이 줄어드는 가산과 떨어지는 가문의 품격에 부인이 괴로워하든 말든, 아비는 변함없는 작자였다. 결국 아이가 아직 아이일 때 어머니가 홧병으로 죽자, 아이는 조그만 얼굴을 흠뻑 적셔가며 울었다. 생애 처음 느껴본 애정이, 다정한 마음이 지던 날이었다.

시일이 지나 아이는 아가씨가 되었다. 아가씨는 여전히 사랑을 잘 몰랐지만, 전만큼 원하지는 않았다. 제 몫이 아님을 그제야 깨달은 까닭이었다. 앞으로 기적이라도 일어나지 않는 한, 아가씨와 사랑은 영영 먼 단어일 터였다. 혹시라도 운 좋게 괜찮은 남자를 남편으로 맞는다면 조금쯤 좋아해볼 수 있을지도 모르되, 아가씨에게 그런 일이 생길 리가 없었다. 가산이 점점 더 빠른 속도로 주는 것을 아가씨는 알았다. 제 차례가 얼마 남지 않은 것도 능히 짐작했다. 도망칠까 몇 번이나 고민하고는 딱 그 횟수만큼 포기했다. 할 줄 아는 것은 겨우 홀로 춤추고 글을 읽고 쓰는 것 정도인 데다 혼인도 않은 계집이 혼자서 무사히 살아갈 방도는 없었다. 공연히 힘을 빼서 생고생을 더하느니 차라리 조금이라도 고개를 꼿꼿하게 세우고 가자, 그리 결정했다. 생각보다 당일에 초연하지 못했던 것은 어린 마음의 실책이었다. 딸 판 돈과 목숨을 함께 도둑맞은 아비의 시체 앞에서 조롱을 내뱉지 않은 것 정도가 최대치의 인내였다. 상처가 곪고 곪아 깊이 썩어 들어간 것을, 아가씨는 몰랐다.

부인이 된 아가씨는 더욱 아팠다. 마음뿐만 아니라 몸까지 아픈 것이 얼마나 큰 고통인지 처음 알았다. 남편은 형편없다는 말도 아까운 자였고, 부인은 여태껏 아프다 말하고 제대로 위로받은 경험이 극히 적었다. 부인뿐만 아니라 남편의 다른 부인들도 신세가 비슷하여서, 부인은 뉘에게도 도와달라 말하지 못했다. 똑같이 가여운 이들을 위한 안식처는 어디에 있을까, 그런 생각은 문득 한 듯하다. 공상은 공상으로 끝이었다. 눈을 뜨면 여전한 지옥이었다. 처음으로 부인은, 저가 무엇을 그리 잘못했는지 헤아려보았다. 아무리 계산을 거듭해도 이리 살 만한 잘못이 없어서 많이 앓았다. 고작, 안식을 바랄 뿐이었는데.

그러다 기적이 일어났다. 유난히 많이 맞고 걷어차인 날, 부인은 몇 번째인지도 모를 기절로 침대에 누웠다. 다들 부인이 죽을 것이라 여겼을 터다. 부인 또한 아, 이번에는 정말 죽고 말겠구나, 희미한 의식 속에서 생각했다. 허나 부인은 죽지 않았다. 꿈에서 부인은 연푸른 안개에 휩싸였다. 이 안개가 나를 강 너머로 이끌어가겠거니 여겼으되, 오히려 안개는 부인에게 복종하는 양이었다. 당신이 바라는 대로 하겠다는 그 달콤한 무언의 표현. 부인은 놀랍고 새로웠으며 두려웠다. 그럼에도 받아들여, 기꺼이 주인 되어 손을 내뻗었다. 손끝 따라 모여드는 안개가 고운 빛이라 기뻤다. 이윽고 부인은 잠에서 깨어났다.

첫 번째로 죽은 자는 명목상으로나마 간호 맡던 하녀였다. 잠들어 있던 하녀는 먼저 잠든 주인의 기척에 깨어 마님, 하고 부르려다 안개를 들이마셨다. 눈이 튀어나오고, 입을 쩍 벌리고, 가슴을 움켜쥔 채 하녀는 쓰러졌다. 둔중한 소리에 무슨 일인지 살피러 온 하인이, 다른 하인들이, 집사가 같은 방식으로 떠났다. 부인은 제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았다. 어릴 적 그리도 바란 기적이었다. 어머니가 이런 미래를 알았다면 슬퍼했을까, 무심코 그런 무의미한 가정을 해보았다.

부인은 남편을 찾으러 갔다. 찾아내어 죽여버릴 셈이었다. 그날도 남편은 술에 취해 다른 부인을 때리다가 뒤늦게 저택 내에 벌어지는 일을 듣고는 달아날 준비를 하고 있었다. 머리채도 헝클어지고 멍이 잔뜩 생긴 부인은 구석에 쓰러져 조용히 흐느끼게 방치한 채, 남편은 창문을 열었다. 그 뒤로 부인이 들어섰다. 뻗은 손끝에서 죽음이 피었다. 살려달라 비는 목소리가 아득한 곳에서 들려오는 듯했다. 남편은 지나치게 시시하게 죽었다. 더 끔찍하게 죽어 마땅한 자였다. 깊은 숨을 몰아쉬던 중, 가녀린 목소리가 있었다. 나도, 나도 죽여주어. 구석에 있던 부인이 조용히 빌었다. 망연한 채 서 있자 살아남은 몇몇 부인들도 조심스럽게 방에 모여들었다. 우리를 죽여주어. 우리를 이곳에 두고 가지 마. 너도 우리가 어찌 될지 알잖아. 그들이 진실을 말했기에 부인은 더욱 괴로웠다. 남편을 살해할 적에는 찰나의 짜릿함이나 통쾌함 같은 것이 일말이라도 있었으나, 그들은 그저 저와 같은 불쌍한 이들에 불과한 까닭이었다. 갈등하는 것을 안 부인들이 계속 빌었다. 죽여주어, 죽여주어. 우리를 부디 저승에 보내주어. 스스로 목숨을 버린다 비난하여도 상관없어. 우리는 다만 죽어서 안식을 얻었으면 해. 안식, 그 단어가 결국 마음을 끌었다. 부인은 손을 들어올렸다.

모두가 죽고 고요해진 저택에서 홀로 호흡했다. 미망인이 된 부인은 그제야 를 제대로 배웠다. 바라던 것이 무엇인지,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지 파악했다. 그 후 어찌 살아가야 좋을지는 한 가지도 생각지 못한 채, 맹목적으로 꿈만을 꾸었다. 바람이 하나뿐이라 하나만 이루어진 것이되, 본디 아는 것이 그 정도라 뉘를 원망할 수도 없었다. 그저 고작 그만한 세상을 가진 것이 죄라 한다면 어머니가 돌아가시던 날처럼 엉엉 울어버리고 말았으리라. 그리고 그 바깥 세상은 남편뿐만 아니라 부인들과 식솔들까지 죄 죽인 악마 같은 계집을 내버려두지 않았다.

마녀 재판에 끌려간다는 소식을 듣고도 여인은 초연했다. 어찌 반응해야 할지를 알지 못한 까닭도 있었고, 이제 와 또 죽을 수 있다 하여도 별 감흥 없는 연유도 있었다. 다만 또다시 사람을 죽이게 될 것, 그것이 피로하다 느꼈을 따름이었다. 기회가 된다면 가급적 빨리 죽이자. 빨리 죽여버리고, 내가 바로 마녀라 선언하고, 덤비라 외쳐주자. 그리고 모두가 종말을 맞게 하자. 오직 그런 마음으로 콜로세움에 닿았다.

닿은 곳에서 만날 사람들이 어떤 이들인지도 모르고.

 

 

 

라미엘, 그 말은 어감이 보드랍고 달콤하다. 꼭 어릴 적 아껴 먹던 단것 같이 생겼다. 입술을 열어 또 한 번 읊어보았다. , , . 사랑하는 라미엘. 그 밖에도, 섣불리 정 주어버리고 만 사람들. 그리하여서는 안 되었을 터이나, 결국 후회하지는 않을 이들. 혼자만의 만족이라 하여도 괜찮을 자들. 그들이 글로리아라는 이름이 얼마나 어여쁘게 들릴 수 있는지 알게 해주었다. 나는 글로리아 에드나 던스턴이다, 긍지인 척 내세운 허세만 있던 이름에 마음이 담겼다. 목숨을 걸고 죽이러 온 자들은 그런 이들이었다. 글로리아는 마침내 환히 웃었다. 웃을 수밖에 없었다.

괜찮다 말하여준 사람, 잘하였다 해준 사람, 귀애하여 준 사람, 다시 만나자 한 사람, 사람, 사람들. 그들이 여인에게 왔을 때 비로소 눈이 뜨이고, 꽃의 향기를 맡을 줄 알며, 구름 흐르는 하늘의 맑음을 배웠다. 여인은 여전히 행운과 거리 멀었으되 세상은 넓고 찬란하여 눈부셨다. 저에게 온정 베풀지 않은 세상과 화해하지는 못하였으나, 비로소 사람을, 사람들을 사랑하였다. 나아가 지키고, 마음 나누고, 외로움은 혼자만의 것이 아님을 알았다. 그리하여 고했다. 세상 끝까지 닿을 수 있도록, 크고 맑은 영의 소리로.

나는, 이런 세상일지라도 마침내 용서하겠다.

그에 세상이 답했다.

너는 이미 용서받았구나.

잘 가거라, 모두 잘 있거라. 다가오는 것들을 받아들어 품에 안는다. 후회 없이 사랑하였기에 눈을 감는다. 마지막에 떠오른 이들이 있어 결국 웃어버린 것 같다. 꽃과 나무들의 속삭임을 들으며, 별들의 광채에 휩싸여 기어이 영원한 빛으로 향하니. 신성한 마녀재판의 장소, 고요한 침묵의 숲 먼 곳에서 춤추는 이가 하나 있다. 긴 머리채 늘어뜨리고는 제 흥에 겨운 박자로 움직이는 소녀 같은 여인, 그 그림 같은 미인이 스친다. 어디를 향하여 가는지도 모르게 바삐 발을 놀려 떠나간다. 흥얼거리는 콧노래의 끝에 빛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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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백소白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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