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코토를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든 할 수 있는 이즈미. 포기하기에는 그동안 바친 내 세월이 아깝잖아, 유우 군. 그렇게 사랑했는데. 그리고 너라면 놓을 수 있겠어? 네가 그렇게 아름다운데.
왼쪽이 오른쪽을 쏘지 않으면 지구 멸망하는 거 되게 고민스러워서 결국 연성 안 함 ㅋㅋ 상식인 이즈미와 싸패즈미와 마코토 죽이고는 자기도 자살하는 이즈미 셋이 머릿속에서 대립해서. 개인적으로는 전세계 사람들이 이미 죽어 있었다면 고민할 필요도 없었을 텐데, 하고 짜증스러워하는 싸패즈미를 보고 싶었다. 그리고 이즈미와 달리 트릭스타는 모두가 죽는 결말 같은 건 당연히 만들 수 없다. 트릭스타에 내버려두는 게 아니었는데. 명예롭게 해볼까, 떨어지는 별의 예우에 걸맞게. 이즈미는 마코토와 이마를 맞대고, 총구를 제 머리 뒤에 댄다. 같이 당기자, 유우 군. 형이 덜 아프게 해줄게.
기사의 검은 적을 위해서지 연인을 위해서가 아님
마코토는 바이고 이즈미는 게이였으면 좋겠다
사랑에 빠진 유우키 마코토를 보고 싶다. 세나 이즈미가 처음으로 빌어본 소원.
루프! 마마마처럼 루프를 하자! 마코토가 계속 죽어서 세나 이즈미가 갈수록 포기하게 되는 것이다 이즈미 미안하다 사랑한다 멘탈을 깨면 더 사랑스러워질 것 같았어 시간이 지날수록 그저 살아 있기만을 바라게 되는 것 바로 그 세계에서, 자신에게 전력으로 헌신해오는 타인을 유우키 마코토는 운명적으로 사랑하게 된다... 완벽... 이즈미는 악마였으면 좋겠다. 마코토는 인간. 호무라처럼 업을 쌓아가는 것이다!
인간을 사랑하지 않을 뿐, 특별히 나쁜 짓은 한 적 없어. 내가 속물인 게 어때서? 유우 군이 아름답다는 것만 누구보다도 잘 알면 된 거 아니야? 내 영혼? 이미 구원의 여지가 없는 물건인데 몇 번 더 내던진다고 문제될 게 있겠어? <<진짜 내 취향 듬뿍이라 할 말을 잃었습니다
미니스커트에 스타킹까지 갖춰 입은 여장미인공 이즈미가 마코토를 이케이케하는 게 보고 싶었다
마코토 목소리 녹음한 거 들으면서 좋아하는 이즈미 옆에서 태연하게 마오랑 같이 찍은 스사 꺼내는 리츠 (ㅋㅋ)
비를 맞고 마코토를 만나러 가는 이즈미도 보고 싶었다 진짜 사심 가득
이즈미는 이러면 안 된다고? 왜 안 되는데? 가 너무 잘 어울린다 내 최애 개짱임
기사의 맹세를 어디까지 믿을 수 있을지 망연해하는 별
쓸모없고 아름다운 것을 사랑하는 세나 이즈미가 지나치게 내 병든 취향에 직격이라 당혹스러울 정도. 피사체로서의 마코토가 가장 완벽하다고 여기는 걸까. 진지하게 언젠가 또 납치해서 약물로 조교한대도 납득할 것 같다.
기사의 말은 아름답지만 그가 검을 쓰는 자임을 잊지 마라
솜노트랑 에버노트 털어도 너무 적어서 티스토리 비밀글로 푼 거 긁어옴
나는 당신과 영원을 속삭일 수는 없으리라
한 철 피었다 가버릴 것 같은 푸른 장미가 핀 정원에서 와타루랑 에이치가 차를 마셨으면.
광대 프레임은 와타루에게 위험하다. 하지만 모든 새가 아브락사스일 수는 없으니 함부로 깨고 나오기를 종용하기도 어렵고, 현재는 에이치가 잘 붙들어주고 있는 것 같으니까. 질리면 버릴지도 모른다는 소리를 늘어놓아도 사실은 와타루도 에이치가 계속 저를 붙잡아주기를 바랐으면. 어쩐지 둘 다 잘못하면 부서질 것 같은 느낌이 있다. 에이치도 왼손은 아직 잘라내기엔 아쉽다고 했으니까 서로가 서로에게 미련 있는 거 아닐까? 어떤 순간에도 최소한 등을 맞대거나 손은 잡고 있는 사이라고 동인 해석을 진탕 부어본다. 와타루는 약 냄새보다는 꽃 냄새가 더 많이 나는 에이치를 보고 싶어할 것 같은데, 에이치는 호흡기 쪽이 안 좋은 듯싶으니 함부로 꽃다발을 안기기도 뭣할까. 그래도 가끔은 모자에서 붉은 장미를 꺼내는 기행을 선보였으면 좋겠다. 지루하지 않도록, 더 많이 웃을 수 있도록. 에이치는 상냥하게 말하는 사람이고 내 안에서는 와타루랑 식장만 잡으면 되는 사이이기 때문에 아마 웃어 주지 않을까.
다만 역시 휴일에 외롭겠다는 생각은 들었다. 확실히 에이치는 병약하고 집안도 그러니까, 학교 내가 아니면 사적으로 만날 일이 많지 않을 것 같고. 당신이 없는 휴일은 조금 지루했다고 투정하듯 말하면서 에이치 가볍게 끌어안는 와타에이... 언제나 같은 결론 같지만 아무렴 어떻지.
토모야는 와타루를 좋아하지만 와타루에게 토모야는 자라날 후배고 좋아하는 사람은 에이치라는 해석인데, 사실 그 와타루가 토모야 앞에서 우는 얼굴을 보인 게 굉장하기도 해서 살짝 감정적으로 흔들렸는데 스스로 자각 못 하는 거면 좋겠다. 스스로 배려가 부족하다고 하는 것이며 사랑에 집착하는 것까지 진짜 인간관계에는 서툰 느낌이라, 스스로가 스스로를 가장 모르는 거였으면.
잠시 당신 울었잖아요! 하고 부르짖으며 와타루를 붙잡는 토모야 같은 게 생각났는데, 어린애한테 못되게 구는 느낌이라 그만두기로 했다.
와타루 매드해터 잘 어울릴 것 같다고 생각했는데 에이치가 매드해터가 되어 나타났으니 과학적으로 사귄다. 개인적으로 에이치는 주도적인 화이트퀸이나 앨리스 보고 싶었는데.
아이가 태어난 날은 온 집안이 축제 분위기였다. 출산하느라 고생한 주인 마님과 장차 상단의 주인이 될 첫 아드님의 안녕을 기원하는 축배를 들고, 주인 부부의 인품을 칭송하는 목소리와 아기씨처럼 고운 사내아기는 처음 보았다는 호들갑으로 넓은 집 전체가 소란했다. 주인 마님의 상태가 오랫동안 진통을 겪은 사람치고 양호한 상태인 데다, 나기 전부터 부모가 고심하여 정한 예홍(叡虹)이라는 이름을 받은 아기도 잘 울지도 않고 얌전하여 모두가 하늘의 은혜라 이야기했다. 혼인 후 몇 년째 자식이 없어 염려하던 끝에 얻은 귀한 후사였다. 몸도 튼튼하고 돌보기 덜 까다로우며 외모까지 준수해 보이는 대상단 주인 첫아이의 소식은 반나절 만에 지고 전역에 퍼졌고, 상단과 긴밀한 관계인 홍화의 귀하신 분들에게도 며칠 만에 전해졌다. 곳곳에서 축하 선물이 속속 도착했다. 덕망 높은 주인들도 기쁘게 화답했고, 하늘에 자라날 아이의 행복을 기원했다.
모두의 바람에 부응하듯 도련님은 건강하게 자랐다. 또래보다 걸음마도 일찍 뗐고, 언어 습득도 빨랐다. 유모는 도련님이 아주 총명하다고 지겨울 만큼 칭찬했다. 부모도 자주 웃지 않아 아쉬운 점 외에는 모든 방면에서 우수한 아들을 자랑스러워했다. 천지 분간 못 할 대여섯 살 무렵에도 세 살 어린 여동생에게 놀라울 만큼 살가워 그야말로 날 때부터 완벽한 아이였다. 정해진 공부량을 끝내자마자 곤충 채집을 하겠다고 달려나가는 모습도 다들 그저 흐뭇하게만 보았다. 온갖 나비를 잡아와 뿌듯해하는 얼굴로 내보이는 아이를 사랑하지 않을 재간이 없었다.
상황이 조금 달라지기 시작한 것은 도련님이 아홉 살 된 해였다. 어리고 사랑스러운 아이는 불현듯 죽음에 관심을 보였다. 갓난아이 때부터 저를 예뻐한 늙은 하인의 시신을 마주했을 때 첫 징후가 나타났다. 난생 처음 시신을 본 아이는 울지도 두려워하지도 않고 가만히 쳐다볼 따름이었다. 맑은 자색 눈이 딱딱하게 굳은 안면근육과 창백한 피부, 축 늘어진 팔다리를 꼼꼼히 훑었다. 작은 손을 뻗어 기묘한 각도로 내뻗은 죽은 이의 손을 들어 올려 보았다가 불시에 놓았다. 주름진 손이 바닥에 툭 떨어졌다. 아이는 팔을 들어 소매 끝으로 제 코와 입을 가렸다. 드물게 얼굴을 찡그린 채였다.
“차가워. 냄새 나고.”
곁에 선 다른 하인이 넋을 빼고 있다가 뒤늦게 정신을 차렸다. 죽은 이와 기껍게 지내던 자였다. 목소리가 미세하게 떨렸다.
“죽어서 그렇답니다, 도련님. 죽으면 몸이 썩거든요.”
“명이 아범도 죽으면 이리 되나?”
“예, 그렇지요……. 살아 있는 것들의 필연입죠.”
“나나 아버지, 어머니도 그런가?”
“슬프지만 그렇습니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에요.”
하인이 고개를 숙였다. 발육이 빨라도 아직 아이인 도련님 시야에 빨개진 눈이 보였다. 아이는 일순 미묘한 표정이 되었다. 어머니가 손수 묶어준 긴 머리카락이 실바람에 날렸다. 다시 고개를 내려 죽은 이의 얼굴을 보았다. 저를 보며 늘 환히 웃던 얼굴, 다정히 안아주던 팔이며 든든한 등도 썩어 없어진다. 뼈만 남은 하인은 도련님을 목말 태우기에는 무리다. 아쉬웠다. 아이는 아직 죽지 않은 하인을 돌아보지 않고 안채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장례 준비 잘 하여라.”
“마음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도련님.”
뒤늦게 하인은 아직 어린 도련님께 괜한 이야기를 하였나 염려했지만, 다행히 주인 부부의 불호령은 없었다. 아이는 그때 들은 말을 저 혼자서만 두고두고 곱씹었다. 태어나면 모두 죽는다. 사람의 마지막 이부자리는 무덤이며, 살아 있음은 곧 죽어감이다. 그렇다면 삶은 무의미한 것일까? 이 명제는 한동안 작은 머릿속에 들어앉아 떠나지 않았고, 이후 아이의 최종 목표를 정해주었다. 아이는 영원히 지켜질 아름다움, 스러지지 않는 존엄한 빛을 소망하기 시작했다.
몇 년 전에 채집한 나비들은 그러한 행보의 처음이었다. 아이는 날개 고운 나비들을 바늘로 꽂아 보관하다가 무늬에 질리면 몰래 부스러뜨리고는 했다. 발견한 하인이 놀라 못된 종의 장난질로 오인하고 빌러 오는 것이 재미있었다. 짐짓 온화한 미소를 띠고는 괜찮다며 날개 가루 씻어낸 손으로 하인의 거친 손을 잡아주기라도 하면 크나큰 은혜를 입은 양 굽히던 치들은 지대한 즐거움을 선사했다. 은혜는 은혜였다. 진범을 찾지 못하는 무능한 자에게 친절을 베풀었으니. 아이에게는 늘 지나치게 순박한 자들이었다. 도련님은 그러한 아랫것들의 어리숙함을 제 자신과 부모와 누이 다음으로 좋아했다. 귀속된 충성은 소중한 장난감이었다. 나비들 또한 그러했고, 나비들만 그리 쓰이지도 않았다. 다음 차례는 작은 들짐승이었고, 그 다음은 맹수, 마지막은 사람이었다. 아이의 신체와 함께 성장한 탐욕이 아가리를 벌리기까지 딱 여섯 해 남은 시점의 일이었다. 그때까지 아이의 세상은 평화롭기 그지없었고, 모두가 아무 문제 없다고 생각했다.모형왕국은 늘 보기 좋은 형상이었다.
처음 시놉에는 뒷부분이 더 있지만 그냥 잘랐다. 제목은 뒷부분까지 써야 어울리겠지만 본문 이후 청소년 시점부터는 완전무결한 쓰레기가 되고, 첫 애정사와 관련한 쓰레기 같은 일화가 있는데 쓰면서 즐거울 것 같지 않아서 쓰지 않기로 했다. 어지간하면 유쾌하게 작업할 텐데 정말 쓰레기 같은 내용이라. 열여덟 살 즈음에 상단에 새로 들어온 하수인 딸한테 첫눈에 반하는데(나름의 유열로 넣은 설정이다) 이때는 이미 실체가 드러나기 시작할 때라 이 아가씨는 당연히 도련님을 무서워했다. 얼굴과 돈과 표면적인 태도도 통하지 않았고, 얘는 사이코패스에다 사람한테 비이성적으로 집착해보기는 처음이라 더더욱 포기할 수 없었다. 결말은 아가씨가 애 집구석에 감금됐다가 배를 타고 타국으로 탈출하던 과정에서 쓰레기도련님의 끈질긴 추적에 절망하고 자살함. 확실하게 죽으려고 자기 배 찌르고 바다에 뛰어내렸다는 설정. 내 쓰레기놈은 시체를 수습해서 박제하고 자기 방에 몇 년 동안 보존해뒀다. 그러다가 어느 날 죽은 여자의 미모가 더는 전보다 못하다고 판단하고는 즉시 정이 떨어져서 내가라고 지시함. 시신은 하인들이 알아서 묻어주지 않았을까? 아무튼 이 사건 이후로 자기는 애정사랑 연이 없는 것 같다고 생각하고 후사를 잇기 위한 혼담에도 미적지근하게 반응하고 있음. 캐가 지나치게 쓰레기화되는 것까지는 막고 싶었던 오너의 노력과 어느 정도는 사회화된 사이코패스의 모습에 기반한 설정이다. 후임은 아마 여동생 자식 쪽에서 찾을 듯. 시스콤 기질이 좀 있어서 매제는 싫어할 예정.
1~3편 수정본+뒷이야기 통합본. 굼벵이 같은 자덕질이었지만 굉장히 즐거웠다! 3편에 적어뒀던 자잘한 설정은 아래에 백업해뒀고, 노동요는 이쪽. https://youtu.be/t8GnpG_bE88
에드워드 조이스는 이상적 통계의 평균치에 근접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적당히 먹고 살만한 재정이 보장되며 가족 구성원 모두 신체․정신적 문제 없이 화목한 집안은 그 자체로 거대한 행운이다. 에드워드는 이 행운을 20대의 초입까지 누릴 수 있었고, 어린 나이에도 그 가치를 잘 아는 드문 경우 중 하나였다. 타고난 선한 성품으로 주위 사람들을 아끼고 위하는, 시시할 만큼 정석적인 태도가 에드워드의 삶의 기본이었다. 큰 성취는 없지만 큰 갈등도 없는 지극히 무난한, 불행과는 거리가 멀어 보이는 삶. 그리고 이런 삶을 진창에 밀어넣는 것이야말로 흥미로운 이야기의 모범적인 시작일 터다.
고도의 발전을 이루지 못한 나라에 가장 치명적인 요소는 자연적인 재해다. 그 중 하나인 역병은 거의 주기적으로 제 존재를 일깨우기 일쑤이며, 우연히 에드워드가 사는 도시까지 전염된 것은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었다. 상점을 운영하는 아버지를 온 가족이 돕던 와중 병약한 어머니가 몸져누운 것이 시작이었고, 다음은 어머니의 체질을 물려받은 누나였다. 제때에 치료받아 완치될 법도 하건만 얄궂은 타이밍으로 두 사람 모두 죽어버리고, 아버지는 슬픔을 이기지 못하고 과음하다 돌아오는 길에 마차 사고로 반신불수가 되었다. 에드워드 혼자 상점을 지키기 위해 기를 썼지만 수완도 일손도 부족한 상황에서는 당연히 역부족이었다. 결국 상점을 다른 사람의 손에 넘기던 날, 서로 닮은 부자의 눈가는 같은 붉은 빛으로 젖어 있었다. 소리 내지 않고 우는 법을 익히기까지는 생각보다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내리막은 갈수록 좁아져서 아무리 발버둥쳐도 떨어지기만 했고, 가속도는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아버지는 나날이 늙어갔다. 음울한 얼굴로 집에 틀어박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물어도 답이 없었다. 종일 궂은 일을 하느라 지친 에드워드도 아버지가 드러내는 모든 징후를 신경 쓰기는 어려웠다. 어느덧 부자는 살기보다는 버티게 되었고, 그것은 어느 누구의 잘못도 아니었다. 피상적인 대화와 일방적인 한숨을 관례처럼 나눈 후부터는 침묵이었다. 여전히 빛은 보이지 않았다.
암흑 속에 흘려보낸 시간은 그리 길지 못했다. 아버지가 부른 후 드물게 뜸들이던 밤에도 에드워드는 지쳐 있었다. 품삯을 깎으려 꼼수부리는 사람과 오래도록 실랑이를 벌인 끝에 받아온 몇 푼이 얄팍한 자존감을 할퀸 까닭이었다. 쇳내 풍기는 동전 몇 개가 생계에 얼마나 도움이 될지 구태여 계산해보고 싶지 않다고 생각하던 찰나, 말없이 바라보던 아버지는 입을 열었다. 이제는 그만하고 싶다. 처음에는 그저 지쳐서 하는 소리라 여겼으나, 아무리 위로하고 화내도 대답은 변하지 않았다. 에드워드는 아버지가 진심으로 죽고 싶어한다는 사실을 기어이 인정했고, 한동안 침묵을 지켰다. 머릿속이 온통 잿빛이었다. 취해서라도 도피하자니 술이 아버지를 무능력자로 만든 기억을 지울 수 없었고, 오기로 일어서 걸음을 옮길 때마다 그림자마저 늘어지는 듯했다. 드물게 마주칠 때마다 들여다본 아버지의 눈은 깊고 깜깜했다. 에드워드는 겨우 스물네 살이었다. 두 사람분의 생은 홀로 짊어지기에는 버거운 무게였다.
본디 자살은 고려한 적 없는 수였다. 낙관적은 상황은 결코 못 되어도 에드워드는 천성적으로 바닥만 보고 사는 사람은 아니었다. 그러나 아버지는 의외로 무너지기 쉬운 편이었고, 마지막 남은 에드워드의 소중한 존재였다. 모든 사람이 그렇듯이 에드워드도 돌아갈 곳이 필요했다. 미아로 살아남을 자신은 없었고, 아버지는 아들에게 손을 내밀었다.
아버지의 계획은 단순했다. 동시에 서로를 찌르는 거다, 칼은 고기 자를 때 쓰던 게 있으니 낡아서 안 쓰던 것도 날을 갈면 두 자루가 마련되겠지. 그들은 빵을 사기 위해 온갖 가재도구를 전당포에 판 상태였다. 담담한 목소리로 말하는 아버지 앞에서 에드워드는 고개를 끄덕이려다 푹 수그렸다. 움켜쥔 두 주먹은 비어 있었다. 약속한 날 밤, 에드워드는 하던 일을 모두 그만두었다. 앞으로는 어떻게 살 작정이냐며 걱정하는 말에 애써 웃으며 인사하고 떠나는 발걸음은 어느 정도의 무게였던가. 실행 직전까지의 순간은 낯설고 서름한 얼룩으로만 남아 있었다. 죽기도 전에 세상에서 유리된 듯 아득한 찰나들을 얼기설기 꿰어 맞춘 기억들. 확실히 떠올릴 수 있는 것은 그저 아버지와 아들이 칼을 든 채 마지막으로 서로를 바라보았다는 사실뿐이었다. 마지막으로 빨리 끝내는 게 좋겠다. 동감이에요. 눈을 깜빡이면 눈물방울이 떨어질 것 같아 부러 부릅떴다. 심호흡 후에는 놀이를 하는 것처럼 숫자를 셌고 전혀 재미있지 않았다. 하나, 둘, 셋―에드워드는 아버지가 시킨 대로 세게 찔러 넣었다. 불쾌한 감촉과 함께 칼이 깊숙이 박혔고, 아랫배가 허전했다.
아버지는 힘없이 칼을 떨어뜨렸다. 에드워드는 멍한 얼굴로 아버지의 피 흐르는 배를 내려다보았다. 손이 너무 떨려서 차마 무너진 몸을 받쳐 안을 수도 없었다. 미안하다, 아버지는 겨우 입을 열었다. 눈동자가 이미 혼탁해져 있었다. 정말로 죽일 작정이었어. 함께, 모든 걸 끝내려고 했는데…… 마지막으로 너를 눈에 담고 죽으려니까, 오랜만에 유심히 보는 네 얼굴이 너무 어려 보여서…… 차마…… 용서해라. 피를 쏟는 아버지를 뒤로 하고 에드워드는 다급히 밖으로 내달렸다. 부질없을 줄 알면서도 잠든 의사의 집 문을 두들겼고, 졸린 눈을 비비며 나온 의사는 에드워드의 몰골을 보고 기겁해 뒤로 물러섰다. 피투성이가 된 에드워드의 손에는 여전히 칼이 들린 채였다. 에드워드는 미처 울음을 토해내지도 못했다.
그 후는 뻔했다. 당연하게도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다. 아버지는 먼저 도망쳐버렸다. 없는 돈을 긁어모아 치른 장례식에서도 폐인 꼴로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에드워드에게 누구도 죄를 추궁하지 않았다. 의사는 입을 다물었고, 대다수 이웃은 자세한 정황은 몰라도 평소 행실을 고려하건대 필시 생활고로 아버지가 버티지 못해 어떤 경위로건 사달을 냈으리라 추측했다. 칼 든 손을 본 후 이성을 잃고 온갖 말을 쏟아내는 에드워드를 상대해야 했던 의사도 평상시 잘 아는 사이였기에 가급적 일을 조용히 마무리하고자 했다. 그러한 정성들 덕에 그 주변 일대는 이내 표면적인 평화를 되찾았다. 비극은 한참 전 변두리로 밀려난 이들의 이야기였고, 저마다 바쁜 도시 사람들은 타인의 불행에까지 신경 쓰고 싶지 않았다. 장례식을 도운 사람들도 거기까지였다. 에드워드는 완벽하게 혼자가 되었다.
한동안 에드워드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자살이라도 한 거 아니냐며 숙덕대는 소리가 커져갈 즈음, 한 이웃이 용기 내어 방문해보았으나 집 안은 비어 있었다. 이런저런 추측이 난무하던 와중 윈터폴에 입대한 다른 이웃집 자식에게서 에드워드를 본 것 같다는 소식이 전해졌고, 사건으로 분위기가 위축되어 매출에 지장이 생길까봐 염려하던 사람들은 겨우 한시름 놓았다. 간 곳이 하필 군대이기는 해도 자살했다거나 객사했다는 소식보다는 백 배 나았다. 비록 한마디 언질도 없이 사라지듯 떠나 뒤처리가 성가시기는 했지만, 끔찍한 일이 벌어졌던 집도 잴 형편은 못 되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무사히 넘어가 조이스 가족의 흔적은 빠르게 지워졌다. 남은 것은 무덤들, 집에 남은 낡은 가구 몇 점 정도였고 포스터라는 성을 쓰는, 본디 다른 고장에서 거주하다가 일자리를 찾아 도시로 넘어온 가족은 낡은 가구를 그대로 쓰는 데 거부감이 없었다. 성격 좋은 새 이웃은 그럭저럭 환영받았고, 다른 사람들과도 원만한 인간관계를 형성했다. 그렇게 모든 것이 다시 질서에 편입된 참이었다.
***
어느 날, 포스터 가족은 편지 한 통을 받았다. 발신지는 윈터폴, 에드워드 조이스였다. 모두가 잊고 있던 이름이 되살아났다.
아버지께.
편지는 거의 쓰지 않아서 조금 어색하네요. 그래도 이렇게 대화해보는 것도 제법 신선하지 않을까 시피만요. 저는 잘 지내고 있어요. 훈련이 고되긴 하지만 나날이 늘고 있어서 나름대로 보람도 느끼고, 어쩌다 보니 친구도 생겼어요. 대개 시시한 애기나 주고받기 일쑤여도 덕분에 심심하지는 않아요. 그 녀석은 우습게도 귀족이에요. 신분 같은 건 크게 신경 쓰지 않는 모양이라 좀 신기해요. 뭐, 저도 그쪽이 편하기는 한데. 여러모로 별난 녀석이더라고요. 아무튼, 아버지는 좀 어떠세요? 이웃사람들이 잘 챙겨드려야 할 텐데. 떠나올 때 당부드리기는 했지만 역시 제가 곁에 있는 게 그나마 마음이 놓이는 것 같아요. 물론, 이미 윈터폴에 들어온 상황에서 이런 말을 하기는 너무 늦었지요. 아버지가 저보다 열 배는 더 잘 지내고 계셨으면 좋겠어요. …… 동봉한 건 생활비예요. 윈터폴이 봉급은 많이 주잖아요. 군대에서 딱히 돈 쓸 일도 없으니까 맛있는 거 많이 드세요. 고기도 사드시고요. …… 보고 싶어요, 아버지. 늘 외롭지 않으시기를 바라요.
윈터폴에서, 에드워드.
힘주어 또박또박 쓴 글씨였다. 오랫동안 고민하여 적은 편지임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홀로 편지를 읽어본 가장 존 포스터는 조이스라는 이름을 입 안에서 굴려보았다. 지나가는 이야기로 이전에 살았다던 가족에 대해 들은 기억이 있었다. 두 이름은 빠르게 연결되었지만, 결론이 나온 후에도 여전히 당혹스러울 뿐이었다. 조이스 가족이 정확히 어떻게 되었는지는 몰라도 말을 아끼는 이웃들의 태도를 보건대 필시 비극적인 결말을 맞았을 터였다. 그런데 이 당연한 듯 보내온 편지는 뭐란 말인가, 마치 이곳이 아직도 제 집이라고 믿기라도 하는 것처럼. 게다가 들어 있는 돈은 존의 기억이 맞다면 윈터폴 봉급 전액으로 알려진 금액이었다. 존은 그 돈을 집안 어딘가에 몰래 숨겨두고, 편지는 며칠 동안 거듭 읽었다. 한 자 한 자마다 진심이 담겨 있어 버거웠다. 존은 그런 이야기를 알고 싶지 않았다.
가족에게까지 불행한 역사 같은 것을 알려주고 싶지는 않아, 존은 고민 끝에 일단 이웃에게 물어보는 쪽을 택했다. 공연한 말썽이 생길까봐 편지에 대해 자세한 이야기는 생략하고 넌지시 운을 떼자 필요한 정보는 대강 얻을 수 있었다. 역병 때문에 부인과 딸을 잃은 조이스 씨가 사고까지 당하고는 아들에게 의존해 살다가 어떤 경위로(이 부분은 자세히 설명하지 않으려 들었다) 사망했다고 했다. 존은 그제야 왜 이웃들이 이전 거주자들 이야기를 쉬쉬했는지 깨달았다. 직접적으로 연관되지 않은 입장에서도 꺼림칙한 이야기였다. 그러나 하필 재수 없는 집으로 이사한 불운만 탓하고 있기에는 홀로 살아남았다는 조이스 가 아들의 편지가 계속 마음에 걸렸다. 차분한 말투도 그렇고 정황상 장난으로 보냈을 리는 없건만, 대관절 장례식까지 치르고 갔다는 사람이 어찌 아버지의 생존을 당연시하는지 납득하기 어려웠다. 이후 쭉 홀로 속을 끓여도 마땅한 답이 나오지 않자, 결국 존은 정공법으로 나가기로 했다. 이해할 수 없는 사람은 길게 상대하지 않는 것이 답이었다.
조이스 씨께.
죄송하지만 무언가 착오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아버님은 이곳에 계시지 않습니다. 저는 사시던 집에 이사 온 사람이고, 자세한 사정은 알지 못하지만 조이스 씨가 되도록 평안히 지내실 수 있기를 바라는 바입니다. 돈은 돌려드리겠습니다.
존 포스터.
미친 게 아니냐는 뉘앙스를 최대한 감추느라 꽤 짧고 불친절한 답장이었다. 상대에게 괴로운 기억을 상기시킬 표현을 자제하는 것도 고역이었다. 받은 돈 전액을 동봉한 편지를 보낸 후 존은 그 일을 잊어버리려고 의식적으로 노력했다. 조이스 가족의 사연은 마음에 담아둘수록 심란해지기만 했고, 존은 그 나름대로 자신의 인생으로 바쁜 사람이었다.
에드워드 조이스의 답장은 존이 겨우 윈터폴 청년을 반쯤 잊는 데 성공할 즈음 도착했다. 편지지를 꺼내기 전 잔뜩 들어 있는 돈부터 발견한 존은 관자놀이를 짚었다. 정확하게 저번에 부친 돈의 두 배였다. 설상가상으로 심호흡 후 읽어본 답장도 가관이었다.
포스터 씨께.
죄송하지만 그쪽이야말로 착오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제가 편지를 보내면 이웃분들이 아버지를 대신 보살펴주실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분들이 따로 간병인을 구하신 건가요? 제게 미리 언질이라도 주었더라면 좋았을 텐데요. 지난번 편지를 제대로 읽지 못하신 듯한데, 저는 리 조이스 씨의 아들입니다. 믿기 어려우시다면 아버지께 여쭤보시지요. 피치 못할 사정으로 제가 타지에서나마 아버지의 생계를 책임지고 있습니다. 보내드리는 돈에는 관련 비용과 수고비가 포함되어 있다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저 개인에게는 무용한 돈이니 부디 아버지의 생활에만 신경 써 주시기 바랍니다. 편지만으로는 자세한 말씀을 드리기 어렵지만, 이건 제게 아주 중요한 일입니다.
에드워드 조이스.
이유는 몰라도 에드워드 조이스의 믿음은 매우 굳건했고, 존은 더 참을 수 없었다. 안 그래도 최근 고민 많아 보이던 남편을 걱정한 아내는 이야기의 전말을 듣고는 함께 두통을 앓아 주었다. 여러모로 골치 아픈 문제였다. 아무래도 제정신이 아닌 것 같다는 아내의 의견에 존도 열렬히 동의했다. 아예 미쳐 날뛰는 광인은 보았지만, 이런 경우는 처음이라 영 껄끄러웠다. 그냥 무시해버리는 편이 나을지 고민하던 때, 아내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그런데 우리, 돈 필요하지 않았어?
아내가 제시한 것 같은 방안을 고려해보지 않았다는 거짓말은 할 수 없었지만, 분명 뒤가 켕기는 일이었다. 존은 객관적으로 딱한 처지에 있는 사람이 아무리 불편하더라도 속이는 짓까지는 하고 싶지 않았다. 선의의 거짓말도 결코 진실은 될 수 없었다. 그러나 아내는 포기하지 않고 설득했다. 어차피 지금 진실을 알려주어도 그 사람에게 2차 충격을 주는 짓밖에 안 돼. 얼핏 듣기에도 그 사람 혼이 빠진 것 같았다면서? 어떻게든 좀 이성을 찾은 거 같은데, 지금 상태라도 유지할 수 있게 하는 게 진짜 위하는 길 아니겠어? 고민에 빠진 존은 가족들의 허름한 옷차림과 형편없는 식사를 되돌아보았고, 두 통의 편지를 다시 읽은 후 마침내 대답했다. 좋아, 어쩔 수 없지.
***
포스터 씨께.
다른 문제가 생긴 것이 아니라 다행입니다. 잘 계시다니 기쁩니다. 전에는 소고기를 더 좋아하셨는데, 이제는 양고기를 좋아하신다니 시간이 지나면 입맛이 변한다는 말이 사실인 모양입니다. 그런데, 당연히 포스터 씨께서 세심하게 돌봐주시겠지만, 제가 떠나오기 전까지는 종종 밤잠을 이루지 못하시던데 지금은 괜찮은지 염려되는군요 아무래도 타지에 있어 잔걱정이 많은 점 죄송합니다. 번거롭겠지만 잠자리도 살펴주실 수 있을까요? 부탁드립니다. 저는 늘 잘 지내고 있습니다. 아버지께서 걱정하실 만한 일은 조금도 없다고 전해주세요.
에드워드 조이스.
세 번째 편지를 받고, 존은 에드워드가 다툼을 좋아하지 않는 성격일 것이라고 추측했다. 에드워드 입장에서는 아버지를 돌보는 사람이 딴소리나 늘어놓고 있던 상황인데도, 존이 대강 얼버무리고 적당히 꾸며낸 안부를 전하자 바로 태도를 누그러뜨리고 아버지 걱정만 하는 게 범상치 않았다. 처음부터 보내는 금액이 고정되어 있는 점도 고려하면 어지간히 효심이 깊은 모양이었다. 물론 이러한 깨달음이 과연 서로에게 도움이 될지는 깊이 고민하고 싶지 않았다. 에드워드는 존이 전하는 소식에 만족했고, 존도 죽은 조이스 씨를 부양하는 대신 그 무덤을 주기적으로 관리하며 에드워드의 돈에 많은 도움을 받았다. 이대로도 나쁘지 않다고 존은 스스로를 납득시키려 했다. 그렇게 한동안 불안정한 평화를 누리고, 일 년이 조금 못 되었을 즈음 모두가 예상한 대로 플레임은 무어스에 전쟁을 선포했다. 여왕의 명령 아래 윈터폴이 전장으로 향했고, 존은 에드워드 조이스가 죽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존은 꽤 심란했다. 그 지역과는 거리가 있는 무어스를 정복하러 간 전쟁이니 가족이 전쟁에 휘말릴 가능성은 극히 낮았으되, 그보다는 가족도 무엇도 아니지만 부득이하게 얽힌 에드워드가 신경 쓰인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었다. 홀로 남은 아버지를 부양하기 위해 윈터폴에 입대한 (것이라고 믿는) 그 청년, 사실은 전장에 나가는 게 두려운 청년, 아버지를 그리워하는 아들이 신경 쓰였다. 꾸준히 편지를 주고받다 보니 에드워드가 고민을 감추는 데 익숙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진작 알아챌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밝은 내용만 편지에 쓰려고 해보았자 전쟁을 준비하는 군대에 있는 사람이 그저 명랑하기만 한 시간을 보낼 리 만무하건만, 에드워드는 늘 거의 필사적인 수준으로 부정적인 이야기를 삼켰다. 어떤 면에서는 대단할 정도였다. 존은 그런 에드워드가 조금 불쌍했고, 감히 동정하는 스스로를 많이 경멸했다. 얼굴도 모르는 사람을 속여 여유로운 생활을 영위하면서도 그 사람이 죽을까봐 걱정하는 행태가 우습기 짝이 없었다. 죽음을 바라지는 않되 살아 돌아오는 경우도 골치 아픈 문제(존은 이런 생각을 한 자신이 부끄러웠지만 이 또한 부인할 수 없었다)라니, 광대의 농담도 이만하지는 못할 터였다.
존의 고민과 별개로 전쟁 정황은 매일 들려왔고, 에드워드는 신의 가호라도 받았는지 자잘한 부상을 입거나 흉터가 생길 뿐 결코 죽지는 않았다. 다만 정신은 마모되는 듯 보내오는 편지 내용이 점차 전보다 피로한 기색을 띠기 시작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전투는 더욱 격해졌고, 에드워드는 꾸준히 요정과 수인을 죽이거나 드물지 않게 동료의 죽음을 목격하는 모양이었다. 하루하루가 피땀으로 얼룩지는 판국에 제정신을 지탱하기는 어려워, 결국 지금껏 굳건하던 자제력이 무너지고 있었다. 척 보기에도 정신이 나간 것 같은 편지가 이어졌고, 그 정도도 나날이 심해졌다. 본래 정상이 아닌 사람임은 알았으되, 정식 간병인이 아닐뿐더러 그쪽 자질도 없는 존에게는 힘겨웠다. 매일 한숨을 쉬고, 일하다가도 넋을 놓는 경우가 늘자 보다 못한 존의 아내, 은밀한 공범이 마침내 결단을 내렸다. 존이 일을 제대로 하지 않는다는 불평을 연거푸 들은 지 겨우 사흘이 되었을 때였다.
모두가 잠든 깊은 밤, 아내가 존을 불러 말했다. 그만두자. 아내는 비록 울타리 밖 사람에게는 비교적 무심할지언정 자기 사람이 힘든 꼴은 못 보는 사람이었다. 당신이 이렇게까지 고민할 필요가 있어? 죽을지 살지 모르겠어서 걱정되면 아예 관계를 끊어버리는 게 답이지. 존은 항변했다. 그건 무책임한 짓이야. 그럼 달리 책임질 방도는 있고? 아내는 단호했다. 다 버리고 떠나자. 여기서 멀리 떨어진 데로 가면 아는 사람도 없을 거고, 만약 있어도 자기 얘기 잘 안 하는 사람이니까 우리에 대해서는 모를 거야. 뭐 알아도 미친 사람 말을 얼마나 믿겠어? 존은 흔들리는 눈으로 꽉 닫은 방문을 힐끗 쳐다보았다. 애가 자고 있던가? 내 말 들어, 존. 아내가 존의 손을 잡았다. 포기하면 거짓말을 더 안 해도 돼. 운이 좋으면 그 사람이 사실을 알아도 밝히지 않을 수도 있고, 우리도 친척에게 정기적으로 돈을 받는 것처럼 꾸밀 필요 없어. 그냥 돈이랑 우리 힘으로 구제할 수 없는 사람을 포기하기만 하면 돼. 당신도 말썽은 싫잖아. 존은 고개를 수그렸다. 최근에 받은 편지에서 처음으로 눈물 자국을 발견한 것이 떠올랐다. 인정할 수밖에 없는 한계였다.
이사 준비는 빠르게 이루어졌다. 이사 갈 곳도, 이유도 밝히지 않아 이웃들이 섭섭해하는 한편으로 사정을 이해해주었다. 일부는 포스터 가족이 무책임하다고 생각했지만, 자기들이라고 크게 다르게 행동하지는 못했으리라는 사실을 인정했다. 함부로 끼어들고 싶은 일은 아니었다. 앞으로 오는 에드워드의 편지를 어떻게 할지 묻지 않은 것은 그들의 배려였다. 포스터 가족은 모든 것을 처분한 뒤 마지막으로 조이스 가족의 무덤에 들러 꽃을 바치고, 한밤중에 도망치듯 떠나갔다. 에드워드를 위해서는 편지 한 장이 낡은 침대 위에 남겨졌다. 조이스 씨가 쓰던 그 침대는 포스터 가족이 처분하지 않은 유일한 물건이었다.
***
전쟁이 끝난 후, 에드워드는 홀로 고향으로 돌아왔다. 제뉴엘이 동행하고 싶어했지만 굳이 혼자를 택한 이유는 제뉴엘의 위치 때문이었다. 본인이 좋든 싫든 귀족 가문 후계자인 사람이 생사가 오가는 전장을 벗어나자마자 군대에서 알게 된 평민 나부랭이의 고향에 따라와서는 안 되었다. 에드워드는 누구에게든 짐이 되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어째서인지 반드시 혼자 돌아가야 한다는 내면의 소리도 굳건하게 울리고 있었다. 오랫동안 보지 못한 아버지를 어서 만나고 싶어 조급한 모양이라고 스스로를 납득시키려 했지만 이상하게 마음이 불안했다. 지난번 편지를 보낸 지 벌써 한참이 지났는데 아직도 답장이 오지 않은 채였다. 전에 없던 일이었다.
오랜만의 거리는 여전한 분위기였다. 드디어 전쟁이 끝난 덕인지 오히려 전보다 더 활기차 보이기도 했다. 피비린내 없는 공기가 다소 어색해 에드워드는 공연히 옷깃을 털었다. 곳곳에서 다른 부대 소속이었던 듯한 사람들(일부는 상이군인이었다)도 눈에 띄었고, 에드워드는 가볍게 눈인사를 건넸다. 평소 같았으면 적당히 안부를 주고받기도 했겠지만 지금은 급하게 볼 사람이 따로 있었다. 빨리 집으로 돌아가 아버지를 만나야 했다. 그래야 마주치는 이웃들마다 귀신 본 듯한 얼굴로 입을 벌리거나 손가락질을 해대는 이유를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무언가 말하려는 사람들도 있었으되 듣고 싶지 않았다. 아버지를 만나면 모든 것이 납득되리라는 광기 같은 믿음이 들끓었다.
조급한 걸음으로 찾아간 집은 깨끗하게 비어 있었다. 모든 가구가 사라진 실내는 오랫동안 밀폐되어 있던 공간 특유의 음습하고 답답한 공기로 꽉 찬 상태였고, 바닥 틈새마다 가득 낀 먼지가 날렸다. 어디를 보나 최근까지 사람이 산 흔적이 전무했다. 혹시나 해서 아버지를 소리쳐 부르며 그리 넓지 않은 집 안을 돌아다녀도 돌아오는 대답도, 있어야 할 사람도 없었다. 빈집에 남아 있는 것은 아버지가 쓰던 침대뿐이었다. 위에는 편지 한 장이 놓여 있었다. 존 포스터의 필체였다. 이상하게도 에드워드는 그것을 펼쳐보기가 몹시 두려웠고, 어찌 된 일인지 알아야 할 상황에서 원인 모를 감정에 흔들려서는 안 된다고 스스로를 꾸짖었다. 떨리는 손으로 펼쳐든 편지는 단 두 문장뿐이었다.
죄송합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바로 밑에는 조잡한 약도가 그려져 있었다. 날 때부터 쭉 살아 근방 지리에 훤한 에드워드는 목적지를 한눈에 알아차렸다. 어머니와 누나가 묻힌 공동묘지였다. 왜 하필 그곳을 지목하는지, 존 포스터는 어디로 사라졌으며 집은 어떻게 된 것인지 의문을 품을 틈이 없었다. 머리가 생각하기 전에 몸이 내달렸다. 마지막 열쇠가 기다리고 있었다.
***
봉긋한 봉분 위로 돋은 풀이 간간이 부는 실바람에 살랑였다. 발치에서 말라비틀어진 꽃송이가 채였다. 누구도 눈길 주지 않고 지나치는 묘비에는 리 조이스라는 이름이 선명하게 적혀 있었다. 에드워드는 어떤 말도 하지 못했다. 울음도, 비명도 불가능했다. 주먹을 쥘 힘조차 남지 않고 모조리 심연에 빨려든 듯 무엇도 느껴지지 않았다. 오직 더는 도망칠 곳이 없다는 사실만이 명료했다. 무릎이 단두대 날 떨어지듯 무너졌다. 심연 속 기억들이 회오리치며 치솟아 지옥도를 그렸다. 잊고 싶었고 잊을 수 없었던 순간들이 칼날 되어 파고들었다. 과호흡으로 목에 통증이 일었지만 전혀 중요치 않았다. 죽은 사람의 이름이 견디기 어렵게 아팠다. 아버지를 죽인 아들은 어디로도 돌아갈 수 없었다. 마지막 조이스는 생을 저주하며 쓰러졌다. 모든 곳에 죄는 각인되어 핏물을 흘리고 있었다. 결코 지울 수 없는 낙인이었다.
뒤늦게 알고 쫓아온 이웃들은 다급히 에드워드를 들쳐업어 빈 침대에 데려다놓았지만, 이후 일은 어찌할지 정하지 못했다. 최소한의 인정만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지나치게 사적이고 무거운 골칫거리였다. 실신한 에드워드의 호흡을 확인한 사람은 잠시 차라리 이대로 죽는 편이 본인에게 나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누구도 입 밖에 내지 않되 모두가 동의하는 의견이었다. 눈을 감은 에드워드는 괴로워 보였다. 땀 흘리는 이마를 쓸어준 손은 포옹까지 해주지는 않았다. 사람들은 에드워드가 깨어날 순간이 두려웠다. 길 잃은 자는 홀로 꿈에 침전했다. 아무도 잃어버리지 않고 함께 행복해지는 꿈이 오래도록 눌어붙었다. 새벽은 없었다.
1. 이전에 조이스 가족이 살던 집은 1층 상점, 2층 살림집으로 구성된 건물이라고 멋대로 생각하고 있다. 좁은 다락이 있는데, 에드워드가 자진해서 그쪽을 쓰지 않았을까. 현재는 1층은 세를 주어 다른 가게가 들어왔다.
2. 존 포스터는 30대 중후반 정도. 아내도 비슷한 연배. 아홉 살 정도 된 딸이 있다. 이쪽도 에드워드처럼 문자 그대로 온갖 일을 다 해서 근근이 먹고 살다가, 지금은 틈틈이 배운 기술로 어설프게나마 생계를 꾸리고 있다.
3. 당연히 이 녀석은 ‘사랑을 담아, 에드워드’ 같은 서명은 쑥스러워서 못 하기 때문에 그냥 에드워드다. 편지 부분은 흐름상 적당히 축약할지 고민했지만, 드물게 에드워드의 목소리가 직접적으로 등장하는 부분이니 수정하지 않기로 함.
4. 끝부분에 애 기억에 마법 거는 내용을 넣을까 했는데 복잡하고 글이 늘어지는 것 같았으며 특히 아무리 관계캐여도 남의 캐(엘) 쓸 자신이 없었다…… 커뮤질 n년 해도 안 낫는 고질병……. 아무튼 그렇게 되었다. 에드워드 안 죽습니다. 해피엔딩 땅땅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