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은 피어나 썩는다. 한 가지 측면만으로 그의 성품을 판단하는 것은 섣부른 행동이며, 그의 선한 면이 악한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음 또한 응당 상기해야 할 진실이다. 루이스 에바리스토, 클라우디오 다 실바는 선善의 정도를 걷는 남자였다. 무엇을 지키고, 무엇을 사랑해야 하는지 알았다. 정의를 인간의 형상으로 빚는다면 꼭 그런 모습일 것 같았다.
그래서 하젤 스티미스트는 슬펐다. 하젤의 교수님은 늘 바른 이였건만, 현재 그는 어떠한가? 감금은 보호로, 집착은 사랑으로 오인하여 그만 눈이 멀었다. 누구보다 눈 밝던 사람의 타락은 다른 사람도 아닌 그의 연인에게서 기인하였으니, 이는 마땅히 비극이라 일컬어야 옳을 터다. 자책보다 큰 것은 무력감이었다. 전 괜찮아요, 교수님. 이젠 정말 괜찮은데…… 소리가 되어 나오지 않는 목소리들을, 하젤 스티미스트는 속으로만 몇 번이고 되삼켰다. 당신에게 할 말이 많았다. 그러나 말할 수 없고, 닿지도 않을 것이다. 연푸른 눈은 초점 없이 허공을 헤매고, 죄수는 망연히 생각했다. 그럼에도 보고 싶은 사람은 당신이라는 사실이 얼마나 우습고도 슬픈지, 사랑하는 클라우디오.
알고 있다. 교수님은 저를 지키려는 것이다. 다만 그 방식이 옳지 않음을 깨닫지 못하고 있을 뿐이다. 내 삶은 나의 것이며, 내 발걸음은 나의 의지로 행해져야 하거늘 당신은 한때 내가 잃었던 것을 다시 앗아가버렸다. 손을 내밀면 그 손을 잡고 함께 걸었을 텐데, 어찌하여 우리는 이리 되었나요. 마음에 난 상처가 벌어져 검붉은 피를 흘린다. 바라볼 것 잃은 눈이 시리다.
클라우디오 다 실바와 하젤 스티미스트가 만난 후 많은 사건이 있었다. 고통받고, 지팡이를 겨누며, 끝내 등을 맞대고, 봄을 믿었다. 그의 사망 소식이 특히 허망했던 이유는 그 자체가 봄을 부르는 이임을 안 까닭이었다. 그리하여 재회가 반갑고 기뻤다. 다시는 만나지 못하리라 여기고 있던 이가 살아 돌아왔으니 이제는 즐겁고 행복한 일만 있을 줄 알았다. 그러하였는데, 이는 원한 적 없는 결말이다. 막다른 곳에 선 하젤 스티미스트는 생각한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거지? 우리가 서로를 사랑해버린 것? 독약 같은 사랑을 들이마신 당신을 해독해줄 만큼 내가 천재가 아닌 것?
바로 앞에 놓인, 냄새 좋은 키 라임 파이를 내려다본다. 척 보기에도 맛있게 구워진 것이 언제나 뛰어난 솜씨다. 당신의 요리도, 다정함도, 나를 생각하는 마음도 여전한데 단 한 가지가 변해버려서. 그럼에도 나는 당신을 밀어낼 수가 없으니 참으로 비극적인 일이다. 스티미스트에서의 나날은 너무도 외롭고 괴로웠기에, 현재 내게 유일한 당신을 포기할 수 없다. 그래서 슬퍼. 슬퍼서 못 참겠어. 섧은 사랑을 삼킨 여자가 운다, 그의 한없이 다정한 사랑을 위하여. 똑똑, 마음이 울린다.
당신은 커피 잔을 든 채 창밖을 바라보고 있다. 저 노을이 지나면 밤이 오고, 그러면 또 하루가 떠나가겠지. 감상적인 생각은 내 주력이 아닌데, 어울리지 않는 짓을 참 많이도 하고 있다. 이건 다 당신 때문이지. 탓하지는 않아도 묘한 기분이 들어 곁에 다가가자 돌아보는 푸른 눈에는, 아, 오롯이 내가. 잠시 숨을 멈추고, 다시 호흡한다. 나는 언제나 이 사람이 말도 안 되는 사랑을 품었음을 기억한다. 결코 잊지 못한다, 절대로. 죽어도 당신에게만은 더 죄인 될 수 없어. 당신이 차분한 낯으로 묻는다.
“왜 그래?”
“아무것도 아니에요.”
대답은 빠르게, 기다리게 하지 말기. 그런 철칙을 만들었다. 무언지 알 수 없는 것, 명명할 수 없는 것은 분명 아무것도 아닌 거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러니 이것은 기만이 아니다.
“뭔가 생각한 얼굴이라서.”
“누님 생각 했다면 믿을 거예요?”
“듣기 좋은 소리를 하는구나.”
가벼운 웃음에 따라 미소 짓는다. 당신이 내 얼굴을 좋아하기 때문이 아니더라도 절로 우러나오는 것이 있다. 그것이, 참으로 신기하다. 마음 없이도 걸치던 겉치레가 아닌 진짜 웃음을 끌어내는 사람이 있다는 것, 그리고 그게 수많은 사람 중에서도 당신이라는 것이. 기적이 있는지 묻는다면 내 앞에 선 이 사람이 기적의 현현이라 할 터다.
“너와 이렇게 연말을 보내게 될 줄은 몰랐는데.”
짐짓 가벼운 목소리를 가장해도 무슨 뜻인지 우리는 안다. 나는 그저 웃어 보이고 만다.
“난 누님이 생각보다 얼굴 보는 게 참 재미있다니까요.”
“얼굴만 보는 건 아니란다, 엘리아.”
“알아요. 나를 봤지.”
안아주고 싶은 타이밍인데, 커피를 쏟을까봐 잠시 머뭇거린다. 다행히 그새 눈치 챈 당신이 커피잔을 창가에 내려둔다. 나는 팔을 벌려 당신을 끌어안고, 당신의 팔도 나를 감싼다. 닿은 온기가 이따금 먹먹할 때가 있다. 이건 당신도 마찬가지겠지.
“고마워요, 나를 봐주어서.”
“그럴 땐 사랑한다고 하는 게 맞단다, 남편.”
“좋아요, 유일하게 사랑하고 있어요.”
나는 작게 웃음을 터뜨리고, 당신의 어깨 위에 턱을 올린다. 서로의 표정이 보이지 않는 자세가 아직까지는 우리에게 가장 잘 어울릴지도 모른다. 조그맣게 속삭여오는 말에 심장이 조인 것을 당신은 알까.
“나도.”
무거운 숨을 토해내고, 안은 팔에 힘이 들어간다. 난 할 수만 있다면 당신한테 심장이라도 꺼내주고 싶어. 내가 가진 모든 걸 주고 싶다가도, 가장 귀한 것만 골라 바치고 싶어져. 당신은 어때? 당신은, 나를 밀어내고 싶어질 때가 한순간도 없어?
내가 해줄 수 있는 건 고작 이뿐이지. 늘 곁에 있겠노라 다짐하고 또 다짐하는 거. 그래도 당신은 나를 필요로 해줄 테고. 마음이 변하거든 죽여달라 했으니 당신은 나를 목숨 걸고 사랑하는 셈이다. 무딘 가슴에 저릿한 통증이 번지고, 당신이 내게로 와 넘쳐흐른다. 눈물이 꽃잎 될 수 있다면 우리는 진작 화원을 일구었으리라. 나의 화원을 끌어안는다. 이 하잘것없는 온기로라도, 겨우내 얼어붙지 않기를. 우리는 계속 함께일 테니까.
당신이 죽을 때까지.
이 기적이 끝나지 않기를, 당신이 울 일 없기를, 나는 소망한다. 내가 만들어낸 악몽에 시달리는 당신을 내가 끝까지 책임질 수 있게 하기를.
내년을 위한 소원을 들어줘요, 그 정도는 할 수 있잖아.
이윽고 눈이 내린다. 나는 타이밍을 놓치지 않고 당신에게 입맞춘다. 당신은 거절하지 않고, 나는 행복을 느낀다.
라웨샤는 대장장이와 유모의 딸이었다. 이름은 직업 특성상 작명에 능한 어머니가 지어주었으며, 애칭인 라샤 또한 그랬다. 새빨간 두 눈은 이따금 아버지가 귀족 나리의 검집에 세공해 넣는 보석 같았고, 달처럼 반짝거리는 은빛 머리카락은 행운이 라웨샤에게 선물한 것이었다. 그렇게 찬란하니 어여쁜 색은 흔치 않았기에 갓 태어날 적부터 부모는 아이가 자랑스러웠고, 마을 사람들도 사랑스럽게 여겼다. 그리고 이런 이야기가 으레 그렇듯이 행운의 선물은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대장장이와 유모는 그저 인자하게 생긴 이들일 뿐 외모가 빼어난 축은 아니었음에도, 그들의 딸은 이목구비가 또렷하고 고왔다. 모두 그를 두고 하늘이 축복을 내린 것이라 했다. 이 아이는 크게 될 거야. 암, 대단한 미인은 물론이고, 훌륭한 사람도 될 거야. 고작 대장장이와 유모의 딸에게는 과분한 칭찬이었다. 그래도 부부는 기쁜 마음으로 받아들였다. 어쨌거나 아이의 첫 생일이었다. 생일날에는 누구나 그런 말을 들을 권리가 있다. 하물며 최소한의 야망이 있는 부모라면 당연히 제 아이가 세상에 이름을 떨치기를 바라게 마련이었다. 아직 말도 못 하고 걷지도 못하는 아이의 의사는 중요치 않았다. 세상이 라웨샤를 알았고, 불렀다. 라웨샤의 탄생은 그러했다.
겨울바람에 손마디가 곱아든다. 장갑을 끼어도 가시지 않는 추위다. 엘리아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흐린 하늘에서 눈이 송이송이 흩날리고, 사람들은 들뜬 얼굴로 서로들 무언가 속삭인다. 다 짓밟아버리고 싶다. 희디흰 눈밭을 밑창이 더러운 신발을 신고 마구 뛰어다니고, 저 사람들의 소중한 상대들을 죽이겠노라 위협하고 싶다. 하지만 그런 짓을 하면 또 악당 신세다. 여기서 더 못된 사람이 되면 곤란해진다. 그러니 인내하고, 또 인내할 수밖에 없다. 충동을 참는 법은 그 사람의 얼굴을 떠올리는 것이다. 무슨 짓을 해도 더는 다치게 할 수 없을 사람의 얼굴이, 저를 보며 일그러지는 양을 상상하고는 입술을 깨문다. 그러지 마, 나를 사랑해줘.
하지만 당신이 용서하지 않았기에 오히려 당신을 사랑하고 말았지.
악당은 으레 그리 취향이 고약하다.
이제 와 한탄하거나 후회해서 될 일은 아니다. 이미 저질러버린 일들은 그러려니 넘겨버리기로 마음먹었다. 그러지 않고는 도저히 살 수가 없었다. 엘리아는 쓰레기였지만, 아직 죽고 싶지는 않았다. 아마도 미련이 남았던 모양이다, 채 짓밟지 못한 보석에. 자꾸만 눈이 가고, 그러다 마음까지 가버린 그 사람을 끝내 놓을 수가 없어서. 저와 어울리는 이도 아니거늘.
엘리아 로시와 엘리제 로시의 이야기는 동화가 되기에는 잔혹하고, 시가 되기에는 속물적이며, 하물며 누군가의 러브스토리가 되기에도 낭만이 부족하다. 허면 이것의 장르를 무어라 명할 수 있으며, 인물들은 어떠한 역할을 맡을 것인가. 엘리아는 곰곰이 생각해보았지만 그 무엇도 답은 되지 못할 듯했다. 탑에 갇힌 공주를 구하러 가는 왕자? 가둔 자는 바로 괴물로 태어난 왕자이며, 그자는 탐욕스럽기 그지없어 손아귀에 쥔 것을 내어주고자 하지 않는다. 또한 갇힌 이는 공주 아닌 왕으로, 왕자의 반역으로 유폐되었을 뿐 그 사이에는 어떠한 애틋함도 존재하지 않는다. 감금과 탈출에 관한 이야기를 한낱 인물이 마음대로 바꿔버릴 수 있을까? 엘리아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가족과 함께 오래오래 성당에 다닐걸 그랬다고, 뒤늦게 후회한다.
나는 기적을 믿고 싶어요, 계신지 안 계신지도 모르는 신. 응답해보세요. 된다, 안 된다 중 단 한 마디라도 부디 내 귓가에 흘려 넣어요.
나를 위해서가 아니더라도, 적어도 많은 것을 잃은 당신의 또 다른 자손―엘리제라는 이름의 인간을 위하여서라도 되니까. 그 사람 불쌍하잖아요. 너무 많이 빼앗겼잖아. 이제 귀찮거나 그렇지 않은 떨거지를 걷어차버릴지 말지 결정할 수 있게 해줄 때도 되지 않았나요.
그렇지 않은가요?
당신 정말 거기에 있어요?
당신도요, 엘리제?
답 없는 질문이 입 안을 맴돌아 기도를 막아서, 엘리아는 입을 벌린다. 목소리 대신 눈물이 나온다. 언 뺨 위로 흐르는 눈물은 금시에 싸늘해지고, 반짝이던 자안은 초점 잃고 흐려진다. 어느 모로 보나 미아의 행색인지라, 지나가던 이들이 힐끔거린다. 다 큰 어른이 길에서 저러고 있다니, 참 가엾고도 한심한 몰골이지. 수군거리는 목소리들이 파고든다. 개의치 않는다. 개의치 못한다. 나는 권리가 없다. 눈물이 또 한 줄기, 미끄러져 내리고.
눈물이 날 때면 반드시 당신이 보고 싶어진다.
다 얼어붙어 제대로 움직이지 않는 손을 움직여 휴대폰을 꺼낸다. 입력된 번호에 전화를 건다. 이윽고 목소리가 들려오자, 엘리아는 울컥거리며 올라오는 감정들을 쏟아내듯 속삭인다. 깊고 깊어 썩어버린 마음을 담아, 간절히, 짐짓 애절하게.
생은 곧 앓음이었다. 태어날 때부터 아팠고, 죽을 때도 고통을 안았다. 화목한 가정을 꿈꾸던 어린 날이 지나간 후로는 줄곧 악몽뿐이었다. 평생 행복 같은 것은 모르고 살리라 여겼다. 공연히 클로버의 잎 개수로 행복과 행운이 나뉘는 것이 아니었다. 그 둘이 동일한 뿌리에서 나는 까닭에 그 조그만 풀을 기준 삼은 것이다. 뒤늦게 어머니에게 클로버를 가득 꺾어다주어도 그저 행복해 보이지는 않던 그 낯을 이해했고, 가련히 느꼈다. 그리고 미안했다. 아이는 아이가 아이여서 어머니를 돕지 못하는 것이라 생각했고, 아주 틀린 가정은 아니었다. 아비가 도박질을 해대는 것은 한낱 아이가 막을 만한 일이 아니다. 나날이 줄어드는 가산과 떨어지는 가문의 품격에 부인이 괴로워하든 말든, 아비는 변함없는 작자였다. 결국 아이가 아직 아이일 때 어머니가 홧병으로 죽자, 아이는 조그만 얼굴을 흠뻑 적셔가며 울었다. 생애 처음 느껴본 애정이, 다정한 마음이 지던 날이었다.
시일이 지나 아이는 아가씨가 되었다. 아가씨는 여전히 사랑을 잘 몰랐지만, 전만큼 원하지는 않았다. 제 몫이 아님을 그제야 깨달은 까닭이었다. 앞으로 기적이라도 일어나지 않는 한, 아가씨와 사랑은 영영 먼 단어일 터였다. 혹시라도 운 좋게 괜찮은 남자를 남편으로 맞는다면 조금쯤 좋아해볼 수 있을지도 모르되, 아가씨에게 그런 일이 생길 리가 없었다. 가산이 점점 더 빠른 속도로 주는 것을 아가씨는 알았다. 제 차례가 얼마 남지 않은 것도 능히 짐작했다. 도망칠까 몇 번이나 고민하고는 딱 그 횟수만큼 포기했다. 할 줄 아는 것은 겨우 홀로 춤추고 글을 읽고 쓰는 것 정도인 데다 혼인도 않은 계집이 혼자서 무사히 살아갈 방도는 없었다. 공연히 힘을 빼서 생고생을 더하느니 차라리 조금이라도 고개를 꼿꼿하게 세우고 가자, 그리 결정했다. 생각보다 당일에 초연하지 못했던 것은 어린 마음의 실책이었다. 딸 판 돈과 목숨을 함께 도둑맞은 아비의 시체 앞에서 조롱을 내뱉지 않은 것 정도가 최대치의 인내였다. 상처가 곪고 곪아 깊이 썩어 들어간 것을, 아가씨는 몰랐다.
부인이 된 아가씨는 더욱 아팠다. 마음뿐만 아니라 몸까지 아픈 것이 얼마나 큰 고통인지 처음 알았다. 남편은 형편없다는 말도 아까운 자였고, 부인은 여태껏 아프다 말하고 제대로 위로받은 경험이 극히 적었다. 부인뿐만 아니라 남편의 다른 부인들도 신세가 비슷하여서, 부인은 뉘에게도 도와달라 말하지 못했다. 똑같이 가여운 이들을 위한 안식처는 어디에 있을까, 그런 생각은 문득 한 듯하다. 공상은 공상으로 끝이었다. 눈을 뜨면 여전한 지옥이었다. 처음으로 부인은, 저가 무엇을 그리 잘못했는지 헤아려보았다. 아무리 계산을 거듭해도 이리 살 만한 잘못이 없어서 많이 앓았다. 고작, 안식을 바랄 뿐이었는데.
그러다 기적이 일어났다. 유난히 많이 맞고 걷어차인 날, 부인은 몇 번째인지도 모를 기절로 침대에 누웠다. 다들 부인이 죽을 것이라 여겼을 터다. 부인 또한 아, 이번에는 정말 죽고 말겠구나, 희미한 의식 속에서 생각했다. 허나 부인은 죽지 않았다. 꿈에서 부인은 연푸른 안개에 휩싸였다. 이 안개가 나를 강 너머로 이끌어가겠거니 여겼으되, 오히려 안개는 부인에게 복종하는 양이었다. 당신이 바라는 대로 하겠다는 그 달콤한 무언의 표현. 부인은 놀랍고 새로웠으며 두려웠다. 그럼에도 받아들여, 기꺼이 주인 되어 손을 내뻗었다. 손끝 따라 모여드는 안개가 고운 빛이라 기뻤다. 이윽고 부인은 잠에서 깨어났다.
첫 번째로 죽은 자는 명목상으로나마 간호 맡던 하녀였다. 잠들어 있던 하녀는 먼저 잠든 주인의 기척에 깨어 마님, 하고 부르려다 안개를 들이마셨다. 눈이 튀어나오고, 입을 쩍 벌리고, 가슴을 움켜쥔 채 하녀는 쓰러졌다. 둔중한 소리에 무슨 일인지 살피러 온 하인이, 다른 하인들이, 집사가 같은 방식으로 떠났다. 부인은 제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았다. 어릴 적 그리도 바란 기적이었다. 어머니가 이런 미래를 알았다면 슬퍼했을까, 무심코 그런 무의미한 가정을 해보았다.
부인은 남편을 찾으러 갔다. 찾아내어 죽여버릴 셈이었다. 그날도 남편은 술에 취해 다른 부인을 때리다가 뒤늦게 저택 내에 벌어지는 일을 듣고는 달아날 준비를 하고 있었다. 머리채도 헝클어지고 멍이 잔뜩 생긴 부인은 구석에 쓰러져 조용히 흐느끼게 방치한 채, 남편은 창문을 열었다. 그 뒤로 부인이 들어섰다. 뻗은 손끝에서 죽음이 피었다. 살려달라 비는 목소리가 아득한 곳에서 들려오는 듯했다. 남편은 지나치게 시시하게 죽었다. 더 끔찍하게 죽어 마땅한 자였다. 깊은 숨을 몰아쉬던 중, 가녀린 목소리가 있었다. 나도, 나도 죽여주어. 구석에 있던 부인이 조용히 빌었다. 망연한 채 서 있자 살아남은 몇몇 부인들도 조심스럽게 방에 모여들었다. 우리를 죽여주어. 우리를 이곳에 두고 가지 마. 너도 우리가 어찌 될지 알잖아. 그들이 진실을 말했기에 부인은 더욱 괴로웠다. 남편을 살해할 적에는 찰나의 짜릿함이나 통쾌함 같은 것이 일말이라도 있었으나, 그들은 그저 저와 같은 불쌍한 이들에 불과한 까닭이었다. 갈등하는 것을 안 부인들이 계속 빌었다. 죽여주어, 죽여주어. 우리를 부디 저승에 보내주어. 스스로 목숨을 버린다 비난하여도 상관없어. 우리는 다만 죽어서 안식을 얻었으면 해. 안식, 그 단어가 결국 마음을 끌었다. 부인은 손을 들어올렸다.
모두가 죽고 고요해진 저택에서 홀로 호흡했다. 미망인이 된 부인은 그제야 ‘나’를 제대로 배웠다. 바라던 것이 무엇인지,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지 파악했다. 그 후 어찌 살아가야 좋을지는 한 가지도 생각지 못한 채, 맹목적으로 꿈만을 꾸었다. 바람이 하나뿐이라 하나만 이루어진 것이되, 본디 아는 것이 그 정도라 뉘를 원망할 수도 없었다. 그저 고작 그만한 세상을 가진 것이 죄라 한다면 어머니가 돌아가시던 날처럼 엉엉 울어버리고 말았으리라. 그리고 그 바깥 세상은 남편뿐만 아니라 부인들과 식솔들까지 죄 죽인 악마 같은 계집을 내버려두지 않았다.
마녀 재판에 끌려간다는 소식을 듣고도 여인은 초연했다. 어찌 반응해야 할지를 알지 못한 까닭도 있었고, 이제 와 또 죽을 수 있다 하여도 별 감흥 없는 연유도 있었다. 다만 또다시 사람을 죽이게 될 것, 그것이 피로하다 느꼈을 따름이었다. 기회가 된다면 가급적 빨리 죽이자. 빨리 죽여버리고, 내가 바로 마녀라 선언하고, 덤비라 외쳐주자. 그리고 모두가 종말을 맞게 하자. 오직 그런 마음으로 콜로세움에 닿았다.
닿은 곳에서 만날 사람들이 어떤 이들인지도 모르고.
라미엘, 그 말은 어감이 보드랍고 달콤하다. 꼭 어릴 적 아껴 먹던 단것 같이 생겼다. 입술을 열어 또 한 번 읊어보았다. 라, 미, 엘. 사랑하는 라미엘. 그 밖에도, 섣불리 정 주어버리고 만 사람들. 그리하여서는 안 되었을 터이나, 결국 후회하지는 않을 이들. 혼자만의 만족이라 하여도 괜찮을 자들. 그들이 글로리아라는 이름이 얼마나 어여쁘게 들릴 수 있는지 알게 해주었다. 나는 글로리아 에드나 던스턴이다, 긍지인 척 내세운 허세만 있던 이름에 마음이 담겼다. 목숨을 걸고 죽이러 온 자들은 그런 이들이었다. 글로리아는 마침내 환히 웃었다. 웃을 수밖에 없었다.
괜찮다 말하여준 사람, 잘하였다 해준 사람, 귀애하여 준 사람, 다시 만나자 한 사람, 사람, 사람들. 그들이 여인에게 왔을 때 비로소 눈이 뜨이고, 꽃의 향기를 맡을 줄 알며, 구름 흐르는 하늘의 맑음을 배웠다. 여인은 여전히 행운과 거리 멀었으되 세상은 넓고 찬란하여 눈부셨다. 저에게 온정 베풀지 않은 세상과 화해하지는 못하였으나, 비로소 사람을, 사람들을 사랑하였다. 나아가 지키고, 마음 나누고, 외로움은 혼자만의 것이 아님을 알았다. 그리하여 고했다. 세상 끝까지 닿을 수 있도록, 크고 맑은 영의 소리로.
나는, 이런 세상일지라도 마침내 용서하겠다.
그에 세상이 답했다.
너는 이미 용서받았구나.
잘 가거라, 모두 잘 있거라. 다가오는 것들을 받아들어 품에 안는다. 후회 없이 사랑하였기에 눈을 감는다. 마지막에 떠오른 이들이 있어 결국 웃어버린 것 같다. 꽃과 나무들의 속삭임을 들으며, 별들의 광채에 휩싸여 기어이 영원한 빛으로 향하니. 신성한 마녀재판의 장소, 고요한 침묵의 숲 먼 곳에서 춤추는 이가 하나 있다. 긴 머리채 늘어뜨리고는 제 흥에 겨운 박자로 움직이는 소녀 같은 여인, 그 그림 같은 미인이 스친다. 어디를 향하여 가는지도 모르게 바삐 발을 놀려 떠나간다. 흥얼거리는 콧노래의 끝에 빛이 있었다.
주위에 사람이 많았다. 언제나 그렇듯이 저를 둘러싼 무리와, 구세주에게 비는 어린 양 같은 눈의 부모, 입으로 무언가 외치는 동생.
죽어버려!
비명 같은 단말마, 그것이 마지막 말이 되었다. 털썩, 쓰러진 사람이 세 명. 가여운 내 동생. 가여운 카티아. 어째서 네게는 항상 사과할 일뿐인지. 그것도 결코 용서 없을 일만이 우리에게 벌어지고 마는 걸까. 그게 뉘 때문인지는 모두가 알지. 다만 영영 잠든 지금만은 부디 아는 척 말아줘. 나를 원망해…… 네가 그래준다면 나는 더없이 기쁘고 슬플 거야. 우습게도 늘 나를 아껴주신 부모님보다도 네가 더 마음 쓰이다니, 역시 나는 네 말대로 불효자식인 모양이야. 죄송해요, 저는 항상 분에 넘치는 것만 바라는 욕심쟁이로 자라고 말았어요.
아빠, 아빠는 늘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 잘해줘야 한다고 하셨지요. 그들은 자격이 있다면서요. 하지만 저는 제가 좋다고 한 사람의 인생을 망가뜨렸어요. 그뿐만이 아니에요. 저를 아껴준 당신과 당신의 부인마저 죽여버리고 말았지요. 저는 얼마나 나쁜 아이인가요? 꾸짖어주세요, 아버지.
엄마, 엄마는 결혼은 중대사라고 하셨지요. 사람과 사람이 만나 서로의 평생을 맹세하는 마음을 가벼이 여기면 안 된다면서요. 그런데 저는 더 나은 대접을 받아야 했던 사람을 충동적으로 신부 삼고 마음을 찔렀어요. 저는 얼마나 나쁜 신랑인가요? 그 사람 대신 뺨이라도 쳐주시겠어요, 어머니. 당신 부부의 몸과 마음을 깨뜨린 값까지 셈해서요.
꾸지람도, 손찌검도 날아오지 않는다. 역시나 그들은 무른 부모였다. 심지어 원망의 목소리조차 들려오지 않는다. 너는 너무 먼 곳에 가버렸구나, 카티아. 이제 와 후회한다 말하기에는 모든 것이 늦어 지쳐버렸어. 아주 큰 상처를 입어서, 이대로는 어떤 꿈조차 달게 꿀 수 없어. 외로워, 외로워서, 혼자라 미치겠어. 그러니 이리 와, 내 신부 대신 품에 안겨. 나의 절망.
악몽은 생각보다 주기가 들쭉날쭉했다. 누님은 매일 꾼 것 같던데, 이마저 우리는 다르구나. 그런 생각을 하며 엘리아는 이불 속에서 몸을 웅크렸다. 도망자의 겨울은 쌀쌀하다. 3년 만에 재회하여 짐짓 괜찮은 시늉을 해보여도 그 속을 완벽히 덮어 뭉갤 수는 없었다. 사랑도 후회도 마지막 한 점은 보물처럼 안고 달아난 남자가, 이제 그것이 썩어가는 양을 본다. 한순간 빛났던 마음, 마침내 눈물 흘려낸 마음 따위가 바래간다. 머잖아 저것들을 속에서 들어내고 새로운 씨를 뿌려야 하리라. 썩은 것은 곧 거름 되어 토양을 비옥하게 한다고, 아직 아이였을 적 엘리아는 배웠다. 허나 이후에도 꽃을 다시 피워낼 수 있을까? 이 황폐한 땅에, 환희의 눈물을 뿌려 양분 주고 다정한 마음으로 감싸 안아 바라는 단 한 송이 꽃을, 감히 성자의 이름 받은 자가.
그런 기적을.
사랑도 미련도 남은 게 없다는 말은 거짓이었지. 이는 당신이 몰라도 될 기만이다.
그러니 용서하기를.
3년 만의 데이트. 오래된 극장에 두 사람은 앉아 있다. 고요한 관객들 사이 종종 훌쩍이는 소리가 들려온다. 엘리아는 힐끔 곁에 앉은 이를 본다. 그는 자주 그녀의 표정이 궁금하다. 그리하여 이해 서툰 눈으로 들여다보고, 영양가 없는 말을 내뱉고, 사교적이지 못한 마무리를 내고 마는 어른아이. 이런 어른이라면 누구도 사랑하지 않을 거야. 비뚜름한 미소를 한 점 머금고, 영화를 열심히 보는 듯한 낯에 고개를 돌려 화면을 다시 본다. 여자를 달래는 그녀의 다정한 연인, 오랫동안 품어 키운 진주알 같은 밀어들. 언젠가 말해주었다면 좋았을까 싶은 말이 불현듯 떠오름은 필연이었을까.
아름다워, 아름다워요, 언제나요.
당신은 가능성을 믿을까.
그것을, 알 수가 없었다.
마음이 일렁였다.
이미 불가능을 점치고 난 후였던지라, 당신의 답은 더더욱 의외였다. 해피엔딩이구나, 말하는 낯을 들여다보았다. 엘리아는 자신이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알지 못했다. 생각보다 말이 앞서 나갔다.
“저러고 또 다시 헤어질 수도 있어요. 당장의 실낱같은 가능성만 믿고 배팅하다니, 어리석어.”
“헤어지면 어떠니. 그래도 서로가 다시 마음에 들고 연애를 시작하게 됐잖아.”
“가능성은 가능성일 뿐이에요. 이후에 어찌 될지는 모르는 거지.”
“그래, 모르는 거지. 좋게 될 수도, 나쁘게 될 수도 있고. 그렇지만 아까도 말했듯이…… 그러면 좀 어때.”
담담한 음성, 단순한 결론. 역시 우리는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다르다는 생각. 한편으로는 조금 기뻤다. 당신이 나와 같았다면 사랑하지 않았을 것이다.
동시에 두려워졌다.
내가 이 사람을 다시 상처 입히면 어쩌지?
금실 같은 머리카락을 손끝으로 쓸었다. 부드럽고, 섬세하고 보이는 것보다 자극에 반응이 큰 사람. 그러면서도 은근히 속이 무른 이 사람을, 도대체 어떻게 대해야 좋을지.
지고 제일의 상인 집안 성가의 따님은 그 부모가 유일하게 애지중지하는 자식이었다. 예설이라 이름 붙은 아가씨는 성년을 넘긴 오라비보다 세 살이 어렸으되, 그에 못지않게 성숙했다. 그런 자를 혈육으로 두고서는 성숙해지지 않을 수 없는 노릇이었다.
예설은 오라비가 싫고 무섭고, 또 부끄러웠다. 고리대금업 따위를 하며 사람들을 겁박해 성가에 먹칠을 하는 자다. 그럼에도 부모님이 후계를 바꾸지 않는 것은 저보다 오라비가 비교도 되지 않는 장사꾼임을 알고, 자식을 감싸안고픈 어쩔 수 없는 마음 때문일 터였다. 예설 본인도 가주 자리에 관심이 없어 아쉽지는 않았다.
다만 두려웠다. 아버지가 정정하신데도 벌써부터 집안을 휘두르며 하루가 멀다 하고 집에 난장치러 오는 자들을 방치하는 오라비였다. 신기하게도 저와 부모님은 나름대로 상냥히 대하는 듯하나, 얼굴에 주먹질을 해대려는 체납자를 앞에 두고 그림처럼 웃는 양이나 전속 하인들이 크고 작은 잘못으로 주기적으로 주인에게 무시무시한 말을 듣고 매질당하는 것 따위가 번번이 피어날 뻔한 정을 죽였다. 예설은 도저히 오라비, 예홍을 아낄 수가 없었다.
그래서 사람 탈을 썼으되 사람 같지 않은, 그 무심한 자에게도 가족 아니어도 귀애하는 자가 있음을 처음 확신했을 적에는 크게 놀랐다. 복완의 소호라 하였던가. 저보다도 어린 아가씨가 아직 아이일 때 만났다던데, 평시 아이를 좋아하지도 않는 오라비를 어찌 진심으로 반기는지 통 알 수 없었다. 처음 만난 이래 수년이 지나서도 종종 방문하여 예홍을 보고 가더니, 그나마 요즘은 복완가에 난리가 난 이후 어린 가주 되어 수습한답시고 방문이 없었다. 그러나 이제는 대신 오라비가 서신을 보내거나 먼저 방문하기도 한다니, 그야말로 귀신이 곡할 노릇이었다. 그래도 저런 치에게 그 정도 호감을 받는다니 복완소호 또한 대단한 자가 아닌가, 예설은 앞에 앉아 고고히 차를 마시는 예홍을 보며 생각했다. 문득 떠오른 것이 있어 불현듯 입을 열었다.
“오라버니.”
“응?”
차를 음미하던 보랏빛 눈이 예설을 향했다. 언제 보아도 고운 빛깔이나,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님을 예설은 오라비 덕에 배웠다.
“벗과는 지금도 잘 지내?”
진심으로 궁금한 점이었다. 종종 패물을 보내기도 한다는 이야기를 들어서 더더욱 그랬다. 혹시나 그 어리고 신분차 확실한 이에게 무언가 마음을 품은 것은 아닌지 염려되었다. 오라비가 지난번 이미 첫사랑에 한 번 실패한 적 있음이 떠오르기도 하였다. 물론 그러한 궁금증을 대놓고 풀어놓을 자신은 없었다.
예홍은 느긋한 동작으로 찻잔을 탁자에 내려놓더니 평온한 어조로 답했다.
“좋아하고 반겨주어서 볼 적마다 즐겁다.”
나를 비난하고자 함인가, 예설은 잠시 생각했다. 허나 예홍은 적어도 가족에게는 비꼬는 화법을 사용하지 않았다. 남을 찍어 누르는 그 화술에 가족이 학을 떼는 까닭인지, 혹은 가족은 그리 대할 상대가 아니라 판단한 것인지 확신할 수 없었다. 피가 이어져 있어도 예홍은 머나먼 곳에 있는 사람 같았다.
“어떤 사람이야, 그분은?”
“너도 종종 보아 알 텐데. 괜찮은 이다.”
“오라버니가 생각하는 그분은 어떤 분인지 궁금하다는 뜻이야.”
“갑자기 왜? 대답 못 해줄 것은 없다만.”
예홍이 찻잔을 한 번 더 기울였다. 예설은 답할 바를 몰라 잠시 입술만 달싹였다. 그 모양을 보던 예홍이 입을 열었다.
“열심히 살아서 응원해주고 싶은 사람이다. 종내에는 본인의 행복을 이루기 바라.”
예설의 눈이 동그래졌다. 지금 저가 제대로 들은 것이 맞는가, 곰곰이 생각하여도 제 청력에는 이상이 없었다. 누군가의 행복을 빌다니, 오라버니가, 바로 이자가? 낮꿈을 꾸는 것이 아닌가?
“오라버니, 혹시나 연정을 품거나 한 것은 아니지? 복완은…….”
아무리 대상인 집안이라 하여도 평민과 상현 귀족의 신분차는 명확한 바. 복완 직계가 거의 멸족한 현재는 몰락귀족에 가까운 상태일지 몰라도 주위 시선이 곱지 않을 터였다. 현재 예홍의 평판이 더 떨어질 데가 없다 하더라도 혼인은 중대사였다. 그러나 정작 예홍은 태연했다.
“그런 것을 고려하기에는 아직 어리니, 생각도 않고 있어.”
“허면, 더 나이가 차거든 의향이 있다는 게 아니야?”
예설이 기겁하며 물었다. 예홍은 작게 웃었다.
“설아, 내게도 벗이 필요해. 그런 사람이다, 소호는. 정략적인 결합이라면야 못 할 것은 없겠지만, 그런 식으로 연 맺지 않아도 충분히 귀한 사람이니 네가 벌써부터 관여할 필요는 없어.”
더 참견하지 말라는 분명한 거절이었다. 그래도 제게는 퍽 관대한 오라비이건만, 예설은 조금 자존심이 상했다. 그 어린아이가 저보다 기꺼운 존재라는 말인가. 그래도 오라비라고 일말의 정은 남아 있었는지, 멀리한 쪽은 저여도 오라비가 저와 다른 가문 아이를 저울질하는 것은 기분이 묘했다. 목소리가 조금 부루퉁하게 나갔다.
“그래? 앞으로도 정말 참견할 일이 없을지는 두고 봐야겠는걸.”
“글쎄, 내가 과연 혼인을 할지는 잘 모르겠는데…… 나는 나보다는 네가 먼저 혼인하기를 바라.”
뜻밖의 발언이었다. 예설은 또 놀랐다.
“내가, 오라버니보다 먼저?”
“그래. 내가 정정할 때까지는 장사를 맡겠지만, 그 다음에는 네 자식이 현명하거든 맡겨볼 생각이야. 네 남편 될 이는 누군지도 모르고 나와 나이 차가 클 것 같지도 않아서.”
예설은 의자를 바짝 당겨 앉았다. 예홍이 빈 찻잔에 차를 따라 내밀었다. 여전히 놀라움을 감추지 못한 얼굴로 차를 한 모금 마신 예설이 물었다.
“진심이야? 정말로, 내 자식에게 물려주겠다고? 그 애가 아들이든, 딸이든?”
“누구라도 능력이 있으면 할 수 있을 테니.”
“그야 그렇겠지만…… 후계 문제는 신중하게 생각해야지. 오라버니가 정말 혼인할지 말지 아직 모르는 일이잖아. 그때 되면 지금 말한 것 후회할 거야.”
예홍은 가만히 눈웃음을 띠었다. 낮의 햇빛이 창가를 넘어 예홍의 얼굴로 기울었다.
“설령 혼인한다 해도, 나는 자식을 남기고 싶지 않아.”
“왜?”
“나를 닮은 아이를, 사랑할 수 없을 것 같아서. 그것은 아이에게 미안한 일이 되겠지…….”
예설은 무슨 말을 해야 좋을지 몰라 그저 침묵했다. 예홍 또한 구태여 말을 늘일 마음은 없는지 그를 끝으로 웃음 지을 뿐이었다. 마지막 모금을 들이켠 후 빈 찻잔을 내려놓은 예홍은 소리 없이 의자를 뒤로 밀며 일어섰다.
“자, 이제 내 휴식 시간은 다 끝난 것 같구나. 너는 더 쉬고 싶다면 쉬어라. 차 맛이 썩 괜찮으니 즐길 만할 거다. …… 평안한 낮 보내기를.”
그러고는 무슨 색이라 분명히 지칭하기 어려운 그 긴 머리카락과 푸른 옷자락을 휘날리며 지나쳐 가는 예홍을, 예설은 잡지 않았다. 둘은 그럴 사이가 아니었다. 홀로 남은 예설은 예홍의 빈 찻잔을 내려다보다가, 조용히 제 잔을 들어 한 모금 더 마셨다. 쌉싸름한 향이 감돌았고, 때는 아직도 너무 밝은 한낮이었다. 다실 밖 모든 것이 아득했다.
곱슬거리는 백금발을 하나로 모아 묶은 어머니가 웃으며 물었다. 곁에 선 아버지도 최대한 자상히 웃어 보이며 아들을 내려다보았다. 이제 열 살 먹은 소년은 가만히 눈을 깜빡였다.
“모르겠어요.”
“너무 빨리 대답했잖아. 좀 더 생각해봐.”
어머니가 깔깔 소리 내어 웃었다. 소년은 어머니를 빤히 쳐다보다 고개를 갸웃, 했다. 어머니 것과 꼭 닮은 빛깔의 백금발이 이마 위로 흘러내렸다.
“음, 웃는 얼굴이 예쁘면 좋겠어요.”
그저 예쁜 것이 좋아 한 말이었다. 그래도 부부는 입술 끝을 끌어올렸다.
“옳지. 그리고?”
“믿을 수 있는 사람이어야 돼요.”
“부부간의 믿음은 중요하지.”
“맞아. 똑똑하네, 우리 아들.”
어머니는 눈웃음을 띠고 솜털이 보송보송한 뺨을 쓰다듬었다. 아버지도 제법 흐뭇한 얼굴이었다. 소년은 그런 게, 하고 말을 꺼내려다 입을 다물었다. 정확히는 ‘기대할 수 있는 사람’이란 표현이 더 어울릴 터였다. 그보다도 핵심에 가까이 가 닿으면, 자신을 지루하지 않게 해줄 사람. 그러나 지금 굳이 정정하지 않는 편이 부모님을 기쁘게 하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소년은 아직은 좋은 아들이고 싶었다.
“그리고 또? 더 없어?”
“음.”
소년은 고민했다.
“존경할 만한 사람이면 좋겠어요.”
예상 밖 답이었는지 부모님은 다소 놀란 듯했다. 아버지가 더 짙어진 미소를 감추지 않은 채 물었다.
어머니는 감동한 얼굴이었고, 아버지도 이제 자부심을 참지 않는 티가 역력했다. 딱히 칭찬받으려 한 말은 아니었지만 소년은 기분이 조금 좋아졌다. 어머니에게 볼 키스를 받고는 더욱 그랬다. 어쨌든 아이는 아이였다.
“우리 아들은 좋은 남편이 되겠다. 엘리아랑 결혼할 사람은 누군지 몰라도 정말 행복하겠네.”
어머니가 소년을 꽉 끌어안았다. 소년도 방긋 웃으며 마주 끌어안긴 채, 부모님께 말하지 않은 마지막 희망사항을 그대로 삼켰다.
웃지 않을 때도 아름다워야 해요, 저랑 결혼할 사람은. 그래야 우리는 오래오래 사랑할 수 있을 거예요.
다정하게, 변치 않는 마음으로.
십수 년 후.
“엘리아, 그 얘기 안 해줄 거야?”
담벼락에 피보라가 튀었다. 엘리아는 장갑 낀 손을 털며 돌아섰다. 으, 묻었어. 조금 찡그린 낯을 보며 마르코는 재미있다는 듯 웃었다.
“뭘?"
“엘리제 말이야. 다 들었어, 남들 다 보는 데서 데이트 신청한 거.”
“아.”
오묘한 빛 도는 자안이 잠시 정면을 비꼈다. 언제 보아도 얼굴만은 최상품인 치였다. 그러나 그 속에 들어앉은 꼬인 어린애의 명성 또한 퍽 자자하여, 마르코는 아가씨의 취향이 굉장히 독특하다고 생각했다.
“소감이 어때?”
“조금 놀랐어.”
“그게 다야?”
엘리아는 작게 웃었다. 원하기만 하면 못 가질 것이 없을 아가씨가 은애하는 이의 이름이 하필 사랑 모르는 엘리아 힐라리오 로시라니. 엘리아는 누군가 저를 좋아한다는 이유로 불쾌해하며 못살게 굴거나 조롱하는 취미는 없었으되, 죽었다 깨어나도 쉬운 사내가 되지는 못할 터였다. 황무지에 금칠을 하여 보기 좋게 꾸민 것이 딱 엘리아 로시라는 인간의 형상이리라고, 같은 조직원끼리도 이따금 수군거리기 일수였다. 엘리아는 맞는 말에 구태여 반응하지도, 스스로에게 별다른 불만을 안지도 않았다. 간절히 바라는 것 없이 텅 비어 무엇도 품지 않는 그릇이 엘리아 로시였다.
“보스께서 연애결혼을 허락하실까 몰라.”
“내가 개의할 바는 아니라.”
엘리아는 품에서 손수건을 꺼내 뺨의 핏자국을 닦았다. 피비린내와 시체였던 남자가 죽으며 내놓은 분비물 지린내가 섞여 허공에서 역한 냄새가 풍겼다.
“누님이 알아서 하시겠지. 난 신경 안 써.”
“정말? 너 그래도 엘리제는 좀 좋아하잖아.”
“인정하는 거지, 좋아하는 것까지는.”
“이제부터는 더 좋아할 것 같은데. 미인이니까 싫지도 않았을 테고, 아니야?”
엘리아는 한쪽 눈썹을 끌어올렸다. 마르코는 씩 웃곤 대답을 기다렸다.
“뭐, 내가 이러고 다니는데도 좋다니까 신기하기는 하네.”
“그러게 말이야. 대단하긴.”
마르코가 기지개를 켰다. 엘리아는 마르코에게 잠시 시선을 주었다가 이내 돌아섰다. 중요한 이야기를 하기에 적절한 장소는 아니었다.
처음 보스를 배반하자는 이야기가 나왔을 때, 엘리아는 시큰둥했다. 굳이 그래야 하나? 나는 지금도 딱히 불만은 없는데. 태평한 소리를 해대는 엘리아를 설득한 사람이 마르코였다. 제안은 단순했다. 널 보스로 모실게. 그 정도면 충분했다. 애초에 마피아의 그 과시와 권력이 없었더라면 이 바닥에 들어오지 않았을 터였다. 엘리아는 숙고하되 결단은 확실한 인간이었고, 다른 조직원들은 그런 점이 높은 자리에 걸맞다고 평가했다. 엘리제의 마음을 알고도 태도가 크게 변하지 않은 점 또한 마르코의 예상 내였다. 엘리아 로시는 그런 인간이었다. 감정에 극도로 무딘, 유용한 도구 같은 인간.
그나마 의외였던 점은 챙길 가족이 있다는 사실 정도였다. 원체 자기 이야기를 잘 하지 않는 치인 데다 대개 마피아 집단에는 마르코처럼 고아거나 가족과 절연한 경우가 많아 그 중 하나려니 지레짐작할 뿐이었건만, 뜻밖에도 제법 멀쩡한 가정의 장남이었다. 누이동생은 오빠를 경멸하는 모양이었으되, 부모는 아직 장남을 포기하지 않았던지 보자마자 울더라고 엘리아는 말했다.
“뭐야, 그렇게 정성스러운 부모님이 있었어?”
마르코는 키득이며 웃었다. 속에서는 그런 자식이 왜 마피아 노릇을, 하고 비꼬는 고아 꼬마의 목소리가 들렸지만 사감을 억누를 수 있었기에 지금까지 조직에서 버텨온 것이었다. 엘리아는 눈을 살짝 내리깔았다.
“이젠 나랑 관련 없어.”
“연이라도 끊고 온 거야?”
건성으로 던진 말이었는데, 엘리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순간 마르코의 표정이 기묘하게 변했다. 절로 찬 웃음기 어린 목소리가 튀어나갔다.
“왜? 갑자기 꼴도 보기 싫었어?”
“다시 만나면 안 될 테니까, 서로를 위해서야.”
“네가 그런 걸 다 신경 썼어?”
빈정대는 말에도 엘리아는 팔짱 낄 뿐이었다.
“멀리 보냈어.”
“죽였어?”
순간 일 없이도 웃고 다니던 낯짝이 대번에 식었다. 윗놈들에게 짜증나니 웃지 좀 말라는 시비를 걸려도 변함없던 얼굴이었다. 서늘한 자안이 마르코를 노려보았다. 마르코는 저도 모르게 움찔했다. 이윽고, 벨벳 같은 목소리가 깔렸다.
“입 조심해.”
그러고는 휙 돌아서 쌩하니 가버리는 엘리아 로시의 뒷모습에, 마르코는 공연히 바닥에 침을 탁 뱉었다. 사과는 필요치 않을 터였다. 고작 이런 일로 마음을 바꿀 인간은 아니리라. 다만, 당분간은 조금 엎드리자. 다소 찝찝하면서도 퍽 불쾌한 기분으로, 마르코는 발에 채이는 돌멩이를 걷어찼다. 아무쪼록 공작의 심기는 거스르지 않는 편이 좋았다. 그리고 이후 엘리아는 예상대로 그 대화를 언급하지도, 변하지도 않았다. 지긋지긋할 만큼 한결같은 사내였다.
마침내 다가온 디데이 당일에도, 엘리아의 행보는 탁월했다. 보스 다음으로 걸림돌이 될 듯한 엘리제의 데이트 신청을 받아들여 함께 외출한 것이었다. 그 사이 엘리아의 잠정적 부하들은 아직 보스에게 충성심이 남은 졸개들을 완벽하게 처리했다. 적지 않은 시체와 일부 재산 손실이 있었으나 해결 가능한 문제였다. 보스 부부는 하나밖에 없는 딸이 외출에서 돌아온 바로 그때 최후를 맞이했다. 무얼 하고 왔는지 몰라도 퍽 즐거워 보이던 엘리제의 표정이 굳자 몇몇 몰상식한 놈들은 낄낄거렸고, 엘리아와 마르코는 차분했다. 과거의 권위에 바치는 마지막 경의였다. 그 애한테서 떨어져! 외동딸 곁에 선 배반자에게 고함친 것을 유언 삼아, 보스는 본 적 없는 분노와 공포로 범벅이 된 얼굴을 바닥에 찧었다. 방에서 뛰쳐나온 부인 또한 비명을 지르며 쓰러졌다. 엘리제는 멍하니 굳어 있다가 뒤늦게 무슨 짓이냐 고함쳤으나, 일은 벌어진 뒤였다. 엘리아는 그날 하루 동안 정중히 에스코트해드린 아가씨의 귓가에 속삭였다.
데이트 즐거웠어요, 누님.
그러고는 재킷을 벗어 부부의 시체 위로 던졌다. 엘리제 앞을 스쳐 지나가는 등이 주인처럼 당당했다.
“수고했어, 다들.”
새 보스의 치하에 공손한 인사가 잇따랐다. 엘리제는 뒤늦게 총을 뽑아 겨누었으나, 그와 동시에 주위를 둘러싼 조직원들이 전원 옛 아가씨를 겨냥했다. 총 꺼내는 소리가 거슬렸는지 엘리아는 느릿느릿 고개를 돌렸다. 푸른 눈과 보랏빛 눈이 그제야 마주쳤다.
“총 내려놔요, 누님. 안 그러면 나도 목숨 보장 못 할 것 같으니까.”
엘리아가 한 걸음 다가섰다. 엘리제는 여전히 총을 겨눈 채였다.
“내가 생각하는 그런 상황이라면 곱게 죽이진 않을 거야, 엘리아 힐라리오 로시.”
그 말에 엘리아는 아, 역시, 하는 표정을 짓고는 살짝 웃었다.
“지금은 나보다 누님이 먼저 죽을 것 같아서요. 내려놔요. 누님이 총 겨눌 거 예상 못 하고 나갔던 거 아니니까.”
“화근은 남기지 않는 게 좋지 않겠니, 아버지가 너에게 그것도 가르치지 않으셨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데. 날 살려서 뭐하게.”
엘리아는 음, 하고 작게 목을 울렸다. 고개를 살며시 모로 기울이는 꼴이 천진했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거든요. 데이트하고 온 날 죽는 건 기분이 별로일 것 같은데, 좋아하는 사람한테 죽는 건 더더욱 그렇겠다고요. 나는 그래도 누님이 조금 마음에 들었으니까 살려주려고요.”
마르코는 과연, 이라고 생각했다. 과연 엘리아 로시다. 저따위로 저에게 연정 품은 남의 마음을 헤집어놓는 말을 가차 없이 해대려면 우선 발화자가 엘리아여야 할 터. 엘리제 역시 비슷한 감상이었는지, 알 수 없어도 그다지 중요치 않을 다른 이유였는지 헛웃음을 뱉었다.
“그래, 기분 정말 더럽네.”
그렇게 한참을 서 있던 엘리제는 천천히 총을 내리고는, 바닥에 떨어뜨렸다. 심복들이 잽싸게 총을 수거해갔다. 오롯이 두 사람의 무대인 양 주위는 고요했다. 엘리제는 피로해 보였다.
“그래서 이제 어떻게 할 건데?”
엘리아는 엘리제를 쳐다보다 느리게 웃었다. 다시 한 번 에스코트를 신청하는 것처럼 내민 손이 깨끗했다.
“죽이지는 않을게요. 방으로 가실까요.”
엘리제는 싸늘한 눈으로 가족의 원수를 바라보았다. 죄책감은 한 점도 묻어나지 않는 말끔한 얼굴이었다. 지난 낮과 전혀 다른 바가 없었다. 다문 입술이 떨어졌다.
“차라리 죽여줄래? 아니면 내게 죽어주든가.”
그러고는 홀로 옮기는 걸음이 퍽 도도했다. 마르코는 애써 웃음을 삼켰다. 마지막으로 가시 세우는 아가씨의 모습이 아무리 보아도 처량한데, 저 아가씨를 어쩌면 좋나. 엘리아가 마지막까지 굽히지 않은 뜻이 있어 당장 처리하기는 곤란할 터인데, 후에 다시 말해보아야겠다.
엘리아는 무시당한 손을 가만히 내려다보다 아무 일 없었던 듯 제자리에 두었다. 돌아선 얼굴의 두 눈은 한결같이, 곱디고운 보랏빛이었다. 그런 눈으로 평생을 살았을 치였다.
“치워, 지저분하네.”
턱끝으로 난장판이 된 자리를 가리키고는 엘리아 또한 유유히 자리를 떴다. 마르코는 잠시 한쪽 눈썹을 올렸다가, 이내 남은 아랫것들에게 고개를 돌렸다.
“못 들었어? 빨리 움직여!”
그제야 아랫것들의 움직임이 부산해졌다. 마르코의 입가에 웃음기가 스몄다. 생각하기 귀찮은 트러블은 오늘 하루만 묻어놓자. 그토록 고대해온, 마침내 축배 들 날이었다.
보호인지 감금인지 모를 조치로 방에 틀어박힌 엘리제는 짐짓 안정을 가장하였으나, 그것이 거짓임은 심어둔 눈과 귀가 보고해왔다. 기실 보고 없이도 능히 예상 가능한 일이었다. 그나저나, 애정은 사그라지고 이제 증오만 남은 고양이 아가씨는 여기까지였을까. 이따금 마주할 적마다 엘리제는 새로운 표정을 보여주었고, 엘리아는 그것이 조금 아쉬우면서도 호기심이 일었다. 마르코가 일러주지 않아도 엘리제가 위협임은 알았다. 다만 다른 이들은 죄 죽여도 엘리제만은, 아직, 죽이고 싶지 않았다.
단 하루뿐이었던 허울뿐인 데이트가 퍽 즐거웠는지도 모른다. 눈을 맞출 때마다 고운 벽안에 번지던 즐거움, 기쁨, 애정 같은 것이 눈에 밟혔을 수도 있다. 어느 쪽이건 엘리제는 현재 엘리아에게 필요한 존재였다. 아집에 불과함을 스스로 알아도, 엘리아 로시에게 아집은 비길 것 없는 보물이기에 고민할 것도 없었다. 흥미가 식을 때까지 곁에 둘 방도로 고른 선택지는 엘리아 로시답게 기상천외하여, 마르코를 비롯한 심복 전원이 기함하는 신기록을 세웠다.
“왜 안 돼?”
건성으로 멘 넥타이를 보다 느슨하게 풀며 엘리아가 물었다. 마르코는 거의 입에 거품을 물 기세였다.
“그걸 말이라고 해? 엘리제랑 결혼한다고? 제정신이야? 허니문에 칼 맞고 죽은 마피아 보스로 대서특필되고 싶어?”
“설마 누님이 나를 첫날부터 죽이시려고.”
“미친 소리 좀 작작 해, 로시!”
“이젠 너까지 날 그렇게 부르게? 누님인 줄 알고 기대하니까 그렇게 부르지 마.”
“진짜 미치겠네.”
마르코가 제 머리를 헤집었다. 엘리아는 느긋하게 마르코의 머리가 까치집이 되어가는 꼴을 구경했다.
“새가 당장 알 까도 되겠어, 마르코.”
“넌 좀 입 다물어.”
“보스한테 무례하긴.”
투덜거리는 목소리였지만, 마르코는 먼저 입을 다물었다가 곧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보스가 된 후의 엘리아는 전보다 더 조심스럽게 대해야 했다. 이상하게 부쩍 예민해진 것 같은 부분이 신경 쓰였다. 물론 설마 그게 엘리제 때문일 거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엘리아의 감정은 변덕과 호기심이 전부였으며, 엘리아가 아무리 미친 인간이라 해도 이제 와서 엘리제에게 세레나데를 부를 위인은 절대 못 되었다. 그러니까 딱 백일만 소꿉장난질을 해보겠다는 엘리아의 말이 백 퍼센트 헛소리로 들리지는 않았다. 분명 끔찍할 만큼 진심일 터였다.
“대체 어쩌려고 그래? 왜 평생 안 할 것 같던 결혼을, 그것도 엘리제랑 한다고.”
“말했잖아. 누님 정도면 결혼해서 같이 살 수 있을 것 같다고.”
“그거 엘리제가 들으면 기분 엄청 나빠할걸.”
“기분이야 내 존재만으로도 나빠질 텐데, 뭐.”
마르코는 가슴을 치고 싶었다. 말이라도 못하면 좀 덜 얄미울 텐데, 저 혓바닥만은 저놈이 욕을 잔뜩 먹고 실컷 장수하다 죽은 후에도 싱싱하게 살아 있을 거다. 그 와중에도 엘리아는 남 속도 모르고 또 미친 소리를 지껄였다.
“역시 청혼할 때는 흰 정장이 좋을까? 결혼식 때 입는 색이기도 하고, 나 화사한 색이 잘 받잖아.”
“코디는 나한테 묻지 마! 아니, 아무것도 나한테 물어보지 마!”
“하긴, 좋은 조언을 받으려면 돈을 써야겠지.”
“너 나한테는 돈 안 주고 물어볼 생각이었어?”
“우리 사이에 그럴 수도 있지.”
태평한 목소리에 마르코는 끝내 뛰는 듯한 걸음으로 방을 빠져나갔다. 네 맘대로 해! 비명 같은 고함을 듣고 엘리아는 고개를 갸웃했다.
“새삼스럽게.”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꽃 주문을 넣는 엘리아의 낯이 훤했다. 누님이 장미를 좋아하셔야 할 텐데, 중얼거리는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사랑하지는 않더라도 장난감을 품에 안듯 아낄 수는 있다. 엘리제는 엘리아가 기대하게 만드는 사람이었다.
그리하여, 지금 엘리아는 엘리제 앞에 섰다. 마르코에게 말했듯이 가장 고급스러운 흰 정장 차림으로, 싱싱하고 화려한 장미 꽃다발을 품에 안은 채. 누님은 멋진 분이니까 줄곧 저를 걱정해왔을 부모님도 소식을 들으면 기뻐할 거다. 멋진 아가씨와 결혼하는구나, 엘리아. 기뻐하는 부모님의 목소리가 귓가에 들리는 것처럼 생생하여 상상만으로도 즐거웠다. 짝을 찾는 건 좋은 일이었다.
반면 생글생글 웃는 낯을 담은 푸른 눈에는 분노가 차올랐다. 마르코의 고집으로 경호를 붙인 탓에 당장이라도 엘리아를 죽이지 못하는 것이 아쉬운 모양이었다. 엘리아 뒤에 선 경호팀은 먼저 총을 빼어들고 대기하면서도 불안한지 일렁이는 공기가 엘리아의 등에 한가득 달라붙었다. 엘리아는 절로 눈꼬리를 휘어 웃었다. 아, 정말 재미있다니까.
“지금 뭐하는 거야?”
“보시다시피 청혼하러 왔지요, 누님.”
날 선 반응도 개의치 않고 찡긋 윙크를 날리자 엘리제는 기가 막힌 듯했다. 그러나 예나 지금이나 엘리제의 사정은 엘리아가 알 바가 아니었다. 어차피 제 도움 없이는 살아남기 어려울 이임을 아는 까닭이었다. 우위를 확실히 가리는 눈은 이 바닥에서는 필수다. 그러니 거절은 정해진 선택지에 존재하지 않는다. 장미꽃다발을 내밀고, 달큼한 미소를 입가에 걸고, 눈앞의 단 한 사람을 오롯이 풍경에 담았다. 이것은 오직 당신과 나만을 위한 놀음.